독후감 - 민촌
혹시 아직도 이런 사람 있나? 쉽게 말해 내가 만원을 가지고 있는데 10만원짜리 mp3를 사지 못하여 나의 신세를 슬퍼하다가 매일 천 원씩 도움을 받아 생활하는 사람이 조그만 카세트를 가지고 있는 것에 화가 나는 사람. 몇 년 전 보았던 모 신문기사가 생각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도와주었는데 그 가난하다는 사람의 4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어 있었고 이를 본 시청자들이 격렬히 항의를 했다. 가난하다는 사람이 어떻게 손에 금색 반지를 끼고 있을 수가 있느냐며 말이다. 마치 도움을 받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철저히 가난해 있어야만 된다는 듯이. 누가 처음 이런 생각을 하여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이런 생각을 의식 속에서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있을까?
조정래의 소설 을 보면 그 기나긴 세월 속에서 농민들은 참으로 힘겹다. 1년 뼈 휘어지게 농사를 짓고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놀았던 자를 찾아가 양식을 꾸어야 한다. 꾸어도 배고픔의 연속이요 몇 해만 지나면 꾼 양식의 이자를 갚기도 버거워진다. 인간의 근본적 생리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 배고픔이란 잔인하고 구차하고 서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에는 유머가 있고 노래가 있고 행복이 있었다. 오전 내내 밭을 갈면 정오쯤 되어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오는 마누라가 보인다. 막걸리 한 사발 거하니 마시고 곰방대로 담배 한대 피고 나무그늘 아래 낮잠을 잔다. 여편네들은 모였다 하면 세상 이야기를 다 풀어 놓고, 아이들은 굶주려도 뛰어놀기 바쁘다. 위태로워도, 한 순간이라고 해도 이것이 행복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행복을 모르면 슬픔을 알 수도 없다. 철저히 슬프고 가난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삶의 진짜가 아니다.
그래서 이기영의 [민촌]은 1920년대 작품 중에서 두드러진다. 1920년대 현대소설을 대표하는 단어가 ‘리얼리티’라면 이기영만큼 리얼리티를 잘 묘사한 작가도 없을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어두운 일상의 연속, 극단적 결말로 가난을 묘사할 때 이기영은 농촌의 삶을 자연스럽게 작품에 담아냈다. [민촌]이 동시대의 어떤 작품보다 와 닿는 이유는 극단적인 슬픔이 아니라는 점이다. 행복한 순간이 있는 진짜 삶의 모습, 그러나 그 삶이 누군가에 의해 쉽게 슬퍼질 수도 있음을 1920년대 가장 많았던 (2006년 지금에는 소수가 되어버려 더욱 약자가 된) ‘가난’한 ‘농민’들을 통해 보여준다.
점순이와 순영이, 점동이와 서울댁 양반은 소설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꽃피우고 시시 때때로 상대방에 대한 애정을 보이기도 한다. 순영이와 점순이는 방에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눈다. 한창 꽃다운 나이의 소녀에게 남자만큼 관심이 가는 존재가 또 있을까? 쑥스러워 하면서도 순영이는 점순이가 점동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지 않다. 이상하다는 듯 틱틱거리며 말하지만 점순이 또한 서울댁 양반과의 첫 만남이 자꾸 생각나는 모양이다. 참외는 얼마 먹지도 않고 서울댁 양반은 돈을 많이 주고 갔는데 점순이는 기어코 돌려주려고 한다. 가난한 살림에서 자라온 양심이 자꾸 돈을 돌려주라고 하는 것일까? 나는 점순이를 보며 삐죽거렸다.
‘지지배, 왕 내숭쟁이!’
그나저나 점동이는 딱 내 스타일이다. 사람이 왜 그렇게 털털하냐 말이다. 없는 살림에서 어찌나 시원시원하고 늠름하게 컸는지 점동이 같은 남자면 요즘 세상에도 후한 점수 받을 것이다. 여자를 배려할 줄 알아, 유머감각 있어, 거기다 남자답기까지. 순영에게 서슴없이 다가가 농을 치더니 우는 순영이를 두고 서슴없이 입까지 맞추는 건 뭔가. 그런데도 점동이가 응큼해 보이지도 않고 밉지도 않다. 원래 여자란 그렇다. 싫어하는 남자는 머리카락 한 올만 건들어도 짜증나지만 좋아하는 남자의 손길은 더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다.
원래 ‘척’하는 거 내 스타일 아니지만 서울댁 양반이 일부러 점잖은 척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점잖은 습성이 오랜 시간 몸에 베인 것일 뿐 그의 거침없는 입담은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 스스로 양반이면서 양반의 잘못을 비판하니 생각이 개방적인 사람이다. 그의 말은 꽃다운 순영이와 점순이의 가슴에 몰랐던, 혹은 저 마음 깊이 알 것만 같은 애매함 속에 묻혀 두었던 의식을 일깨워 준다. 점순이와 순영이 뿐만이 아니다. 농민들은 서울댁 양반의 말에 정확하게 꼬집을 수 없지만 자기 마음에 어떤 큰 공감과 동의를 느낀다. 그래,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박주사 아들이 나쁜 건 알았지만, 양반 놈들 중에 돈만 많을 뿐 양반 같지 않은 놈 많다는 것도 알았지만 이 사회의 어떤 구조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있었을까? 서울댁 양반이 존경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작농 신세 서러운 건 알았는데 ‘왜 내가 소작농 이어야 하는가. 손에 흙 하나 안 묻힌 놈은 곳간에 쌀이 넘치는데 왜 나는 배고파야 하는가. 이 구조 자체가 잘못되었구나.’라고 생각해 보았던가.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면 그 것은 슬픔에서 그칠 일이 아니라 똑같이 인간으로 태어나 일부만 힘을 가지고서 나머지를 철저히 자기가 원하는 데로 계몽 시킨 건 아닐까. 잘은 모르겠다. 잘은 모르겠는데 무언가 알 것만 같다. 순영이와 점순이, 점동이는 눈물이 났다.
서울댁 양반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몰라도 잘 살아왔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순간도 많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자. 왜 너는 서울댁 양반의 이야기에 분노했을까? 왜 화가 나고 슬펐을까? 무언가 억울하고 아니라는 생각이 왜 들었냐 말이다.
서울댁 양반, 점동이, 순영이, 점순이 넷은 오두막에서 참외를 먹으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부자건 가난하건 그런 것 상관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이지?’라는 인식을 잘 못하게 된다. 혹은 때때로 어떤 것이 계기가 되어 불평과 불만이 불쑥 올라와도 모두 순간으로 끝이 난다. 왜? 나는 이렇게 웃고 행복하니까. 잘사는 저 사람이나 못 사는 나나 어차피 삶이란 행복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는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언제부터인가 머리 속에 쌓여간다. 물론 넷은 행복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는 있다.
박주사 아들은 점순이가 마음에 들었다. 장리벼 한 섬을 주고 첩으로 점순이를 줄 것을 요구한다. 장리벼 한 섬에 딸을 팔았다고 아버지는 실성한다. 어머니도 점동이도 슬프다. 슬픈데 어떡할 것인가? 떠나는 점순이를 막는 것은 근본해결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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