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 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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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 민촌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민촌
1920년대 식민지 하에서 쓰여 진 많은 작가들의 작품 속에는 가난이 등장한다. 그런데 어느 수간부터 나에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최학송의 「탈출기」, 「홍염」을 읽으면서 당시 가난함이 가져다주는 처참한 현실에 너무나도 분노하며 작품을 읽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감정은 주요섭의 「개밥」, 이익상의 「쫓겨가는 이들」 등 책 속의 작품들을 읽어가면서 중고등학교 시절에 국사책에서 배운 내용보다 더 여실히 당시의 상황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민촌을 감상하면서 그러한 나의 감정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이 정도 일 줄이야! 어쩜 이럴 수가!’하고 분노했던 나의 감정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네…….’, ‘나라도 그랬을 거야…….’ 하여 체념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이러한 감정의 변화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사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변화라고는 볼 수 없으리라. 어떻게 보면 가난에 대한 나의 사고를 바꿔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가난이라는 것은 나에게 ‘인간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것을 전생의 죄업(罪業)으로 치부하기에는 조금 부풀리기가 없지 않지만, 가난이라는 현실에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즉 숙명(宿命)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나의 뇌리 속에 강하게 박혀버린 것이다.
소설 민촌에서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 그런 약자들을 이용하는 부유한 사람들, 그리고 가난에 허덕이는 일반 대중들을 편에서 식민지 일제 앞잡이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식민지 사회에서 대부분의 민중들은 ‘가난은 전생의 죄업이요, 부귀는 하늘이 낸다.’는 말처럼, 당시에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영원히 함께 가야하는 존재처럼 여기며 살아갔다. 이기영의 소설 「민촌」에서 등장하는 점순이네 가족이 바로 대표적인 민중이라 할 수 있다. 점순이는 여느 소녀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친구, 순영이가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함께 나눌 만큼 지극히 순수한 열여섯 살 소녀였다. 하지만 식민지 하에서의 가난이라는 현실은 그런 순수한 점순이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차라리 그녀의 부모들이 먹을거리를 위해서 점순이를 박주사 아들의 첩으로 보냈다면 나았을 것을……. 그러면 가난이 어른들로 하여금 자식마저 돈으로 팔았다며 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악한 사회의 현실은 순수하기만한 열여섯 살 꽃다운 나이의 점순이를 제 발로 박주사 아들의 첩으로 들어가게 한다. 이것은 그녀의 부모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딸을 판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극한 비극을 독자에게 전해 준다. 그녀는 아직 가난이라는 것을 현실 속에서 피부로 느끼고 고통 받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닌가. 오늘날 점순이 나이 또래의 중학생들을 떠올려 볼 때 이것은 지극히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모에게 용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서 메이커 옷을 사기를 즐기는 오늘날의 16살 소녀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렇다면 당시에 가난의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서민들을 이용하고, 일제의 앞잡이로 활동하던 부유한 사람들은 어떠한가. 박주사 식구들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모시 두루마기에 맥고모’를 쓴 박주사 아들은 족히 자신의 할아버지뻘 되는 조첨지를 보고서 ‘영감 근력 좋으신가?’ 또는 ‘그래도 좀더 살아야지!’하고 하소를 하듯이 말한다. 자신의 권력을 믿고 웃어른에 대한 공경이라고는 눈에도 찾아 볼 수 없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 주위에서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던 마누라와 며느리들이 말한다. ‘참말로 예전 양반은 양반다운 행세가 있었다네. 예전 양반은 돈을 알면 못쓴 댔는데 지금 양반은 돈을 잘 알아야만 되나 부데.’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양반들은 그야 말로 배운 것이 많아서 양반이 아니라, 주머니에 돈이 많으면 양반이 되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박주사 아들은 얻어먹을 쌀을 구하러 자신의 집에 들른 점순이 엄마에게 흔쾌히 쌀 한 섬을 허락해 주며 하는 말이 가관이다. 벼를 줄 테니, 그 대신 딸을 자신에게 달라고. 가난한 집에서 자란 자식이나, 무엇하나 모자랄 것 없이 자란 부유한 집 자식이나 그 자식을 배 아파서 낳은 어머니의 마음은 다 같으련만 어찌 그런 말을 자식 가진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지. 자기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을 돈 주고 사겠다는 돈 많은 인간이 나타난다면 과연 그는 그것을 허락할 수 있을까. 하지만 돈 꽤나 있고, 당시 우리나라에 있던 일본세력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부유층이라면 사람을 돈으로 사고파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으리라. 정말 때려죽이지 못해 억울할 따름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고 선진적이고 열린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서울 댁 양반이다. 돈이나 권력으로 가난한 민중들을 농락하는 부유층과는 다르게, 민중의 입장에서 박주사 아들과 같은 몰인정한 양반들을 욕하고, 진정한 민중의 평등을 외치던 사람이 바로 서울 댁 양반이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한계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물론 이웃에 사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세상형편을 들려주고, 오직 돈만을 거들먹거리는 부유한 양반들을 욕하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 이상으로 했던 것이 무엇인가.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했는가, 아니면 그들이 실질적으로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는가. 그는 가난에 힘들어하는 농민들의 괴로움을 들어주고, 함께 공감해주는 역할 밖에 하지 못한 것이다. 당시 양반이라 함은 힘없는 약자인 가난한 농민들을 이용해 이익을 챙기는 이들이었는데, 그러한 양반이 아니라 농민들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서울 댁 양반이라는 존재는 그들에게 큰 존재였다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안타까운 점은 그런 그가 가난한 농민들에게 실질적으로 제시해주었던 해결책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과연 가난이라는 것이 해결되지 못할 숙명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껄이고 또 지껄인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이기에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할 수가 있다.’ 고 말이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건강한 나라는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이 교육을 받아서 성공할 수 있는 나라라고 한다. 과연 우리나라의 모습이 그러한가? 부족하지 않을 만큼 적당하게 있으면 된다던 ‘돈’이라는 존재는 이젠 우리에게 절대적인 가치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돈 많은 집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결국 사회에서 힘 있는 권력가 층에 속하게 된다. 돈 때문에 죽고, 돈 때문에 사는 이 세상인 것이다.
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미국이나 캐나다를 비롯한 많은 선진국에 살고 있는 일명 ‘부자’들은 그나마 우리나라의 부자들보다는 어느 정도 일만 민중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다. 자선문화가 발달한 이들 나라에서는 거부(巨富)들이 자신이 졸업한 학교나, 봉사활동을 하는 사회단체에 거액의 돈을 기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설사, 그들이 이런 선행을 한다손 치더라도, 나에겐 눈꼴사납기 그지없다. 과연, 그들이 진정한 마음으로 돈을 기부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거액의 돈을 쾌척함으로써 수많은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는 그 작용을 노리고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사람이 사는 데는 물론, 돈이라는 요소를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것이라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 한마디, 함께 보내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돈 몇 푼을 던져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심히 의심증이 생긴다. 가끔 나는 그런 인간들에게 욕이나 실컷 퍼붓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억누르곤 한다.
서울 댁은 말한다.
‘낮에는 햇빛 밑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달 아래서 하루의 피곤한 몸을 쉬는 천만 사람이 다 같이 일해서 먹고 사는 세상이 참으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될 것이다.’
난 서울 댁에게 한 가지만 묻고 싶다. 그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그것을 인간의 말로 정의할 수 있냐고. 사람은 각자 처한 환경이 다르고, 그에 따라 그것을 수긍하여 받아들이기도 하고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결국은 벗어나고야 마는 사람들도 있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돈이 그렇게 중요한가. 돈 때문에 죽고, 돈 때문에 웃고. 미친 세상이 따로 없다. 인간은 정말 그 어떤 동물 중에서도 어리석다. 밀림 속에 사는 수많은 동물들과 곤충들을 보라. 그들은 철저하게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물론, 도태하는 동물들도 발생하게 되지만, 그들은 굴하지 않는다. 스스로 정착해서 살 수 있는 곳을 향해서 머나먼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철새들을 생각해보면, 이토록 지혜로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그에 비해, 자기가 사는 세상, 그 작은 땅 덩어리가 전부 인양 그곳에서 지들끼리 지지고 볶고 싸우기에 여념이 없다.
가난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이 만들어 낸 허구적 산물이다. 민촌에 등장하는 현대적 인물 서울 댁도 겉으로는 농민들을 생각해준다며 거창한 어휘들을 섞어가면서 웅변을 펼치지만, 그 역시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현실을 한탄하며 그러한 현실과 타협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반 민중들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인간이다. 동물의 세계에는 결코 가난이란 없다. 배고프면 주위를 둘러보고, 먹이를 사냥하면 그만이다. 물론, 피 터지는 결투 또한 존재한다. 수사슴 두 마리가 한 마리의 암사슴을 두고 치열하게 뿔을 부딪치며 싸우는 모습은 우리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한 번쯤은 보았을 장면이다. 또한, 암컷이 알을 낳고 사라지면 알 곁에서 부화할 때까지 목숨을 걸고 보살피는 쥐노래미 수컷을 보자. 짝을 만나 쥐노래미 암컷이 산란을 하면 그 알을 지키는 일은 수컷의 몫이다. 70cm 남짓한 길이의 쥐노래미가 알을 지키기 위해 10kg이 넘는 문어와 싸우고, 불가사리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요,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