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자의 교육관
3. 공자의 교육목적
4. 인의 사상과 교육
5. 공자의 교육방법과 예(禮)
6. 육예(六藝)의 교육
7. 공자의 군자교육론
8. 공자의 교육사상과 한국사회의 수용
9. 참고자료
그에게는 고정된 스승이 없었다. 그는 다만 타인의 장점을 본받고, 단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공은 "우리 선생님께서야 어디에서나 배우시지 않은 데가 있겠습니까? 또한 어찌 정해진 스승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것이다. 공자는 19세 때(B.C. 533년) 견관씨의 딸과 혼인하여 다음해 아들 리를 낳았다. 그는 결혼하던 해에 벼슬길에 나아갔다. 노나라 계씨의 창고 관리직을 맡은 그는 곡물출납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리고 21세 때 가축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 그 번식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이미 30대 청년시절에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이는 삼환씨였다. 이들은 국토를 채읍으로 삼고 군대와 가신을 길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소공은 계평자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삼환씨의 단결된 무력에 패하여 그는 제나라로 도주하였다. 공자도 패배한 임금의 뒤를 쫓아 제나라에 갔다(B.C. 517년, 공자 35세 때). 제나라 경공을 만난 공자는 정치의 요체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안연-11)."라고 말해 주목을 받기도 한다.
제나라에서의 관직 등용에 실패한 공자는 악장을 만나 순임금의 소를 듣고 큰 감명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 음악으로 인해 석달 동안 고기맛을 잊었다고 한다(술이편). 공자가 다시 노나라에 돌아온 뒤에도 정치는 어지러워만 갔다. 임금인 정공은 아무런 실권이 없었고 계씨는 계씨대로 가신들의 발호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즉 가신 양화가 공산불뉴와 손잡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의 반란은 계환자의 계략으로 간신히 수습되었다. 공자는 51세 때(B.C. 501년) 노나라 중도의 재에 임명되었다. 중도 고을은 그가 다스린 지 1년만에 치안과 질서가 바로잡혀 다른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채인후, 공자의 철학, 예문서원
사중명/ 김기현역, 유학과 현대세계, 서광사
안종수, 공자의 학설, 이론과 실천
이기동, 영원한 인류의 스승 공자,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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