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 명성황후 시해사건 -일본 측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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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근현대사] 명성황후 시해사건 -일본 측의 입장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론

Ⅱ. 본론
1. 을미사변과 일본의 계획 및 경과
(1)을미사변
(2) 일본의 계획 및 경과
2. 을미사변의 배경
(1) 삼국간섭
(2) 배일친로책(排日親露策)
3. 민비의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의 문제점
(1) 인아정책
(2) 거일정책
4. 일본의 입장
5. 을미사변 이후
(1) 을미사변의 주범들
(2) 을미사변 이후의 국내·외의 정세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 내정에 깊숙이 관여했던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박영효,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 확장에 힘을 기울인다. 또한 이 당시 청일전쟁의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일본이 청에게 반환한 것은 러시아·독일·프랑스 등 3국에 의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 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최문형 외, “명성황후시해사건”, 민음사, 1992, p.131
명성황후는 이러한 삼국간섭을 계기로 인아거일로써 이노우에의 조선보호국화정책에 정면 도전하였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한반도로부터 밀려나게 된 청을 대신할 수 있도록 러시아를 도와줌으로써 일본의 조선 지배에 타격을 가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러시아와 대결을 할 수 없었던 당시의 일본으로서는 차선의 해결책이 바로 1895년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즉, 삼국간섭 이후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된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이 마침내 민비시해로 나타난 것이다. 나아가 일본으로서도 민비시해가 가능했던 것은 이 같은 국제정세에 대한 왕비의 정보부족과 조선내 일본의 세력기반에 대한 판단착오가 그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문형 외, “명성황후시해사건”, 민음사, 1992, p.192
이러한 을미사변은 단발령과 함께 19세기말 항일의병이 봉기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또한 신변이 위태롭게 된 고종이 이듬해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에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관련하여 일본측의 입장에서 이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을미사변과 일본의 계획 및 경과

(1)을미사변

을미사변은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오가 일본정규군, 영사경찰 및 낭인을 고루 동원하여 1895년 10월 8일 새벽을 기해 자행한 일대흉변이다. 청일전쟁을 패배로 청국이 한반도로부터 밀려나게 되자, 명성화후는 러시아가 청국을 대신하여 일본을 견제하여 줌으로써 일본의 한국 지배기도에 일대 타격을 주고자 한 것이다. 바로 이 상황에서 당시의 일본이 차선의 해결책으로 택한 것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것이었다. 즉, 삼국간섭 이후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된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이 마침내 을미사변으로 귀결된 것이다. 이민원,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 국학자료원, 2002, p.50

당시 삼국간섭의 시기 동안 명성황후에 의해 취해진 배일 및 왕권 회복을 위한 조치는 ①이준용의 체포를 통한 대원군파의 제거, ②김홍집내각의 타도와 박정양내각의 출범, ③박영효의 축출, ④ 시위대의 편성과 훈련대의 견제, ⑤ 민영준·이범진 등 척족세력 및 친러파의 등용, ⑥ 훈련대 해산의 기도 등으로 요약된다. 이민원,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 국학자료원, 2002, p.45
더구나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 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 입장에서 볼 때 명성황후는 일본의 조선 진출에 커다란 장애요소가 되었고 이에 일본측은 이노우에 대시 무인 출신 미우라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고 이는 삼국간섭 이후 요동반도는 물론, 한반도에서조차 위기에 직면한 일본정부가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선택한 하나의 비상대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민원,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 국학자료원, 2002, p.51

이러한 미우라의 부임 37일 만에 민비를 시해하였는데 당시 미우라는 조선을 방문한 적도 없고 스스로도 외교에는 문외한이라고 하던 자가 주도적으로 민비시해를 결심했다고 볼 수 없으며 또한 37일이라는 기간은 너무 짧은 기간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최문형 외, “명성황후시해사건”, 민음사, 1992, p.78
결국 전 공사이자 미우라를 후임자로 추천하였고 미우라와 17일간을 함께 서울에 머물었던 이노우에에 집중되지 않을 수 없다. 이노우에는 당시 일본의 내상과 외상을 역임한 정치 실세로 이토우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의 정계를 움직인 자이다. 그렇다면 ①이노우에는 이러한 민비시해사건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귀국하였을까. 또한 ②이노우에가 떠난 뒤 미우라에 의해 계획이 되었다면 신임공사가 짧은 기간 동안 계획 및 실행 할 수 있었을까. 나아가 ③이 같이 중대한 일이 현지의 공사 독단에 의해 멋대로 되었을까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결국 민비시해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의 준비까지는 이노우에가 한국을 떠나기 이전에 이미 각본이 짜여져 있었고, 미우라는 단지 결행일자의 선택과 사건의 진행에 관한
참고문헌
최문형,『명성황후 시해사건』, 민음사, 1992
이민원,『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 국학자료원, 2002
김재엽, 『100년전 한국사』, 살림출판사, 2006
나홍주, 『오-명성황후』, 아성출판사, 1987
하야시 다께히꼬 외, 『일본인의 한국사 인식』, 삼민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