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과한국전쟁] 중공군의 개입과 국제전(44)
▷ 중국·북한 인민군의 체제와 중미전쟁의 전개
▷ 정전 회담의 개시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까지의 중국 측의 논의에 관해서는 주졘룽의 저서〈마오쩌뚱의 한국전쟁〉이 충분히 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에게는 두 가지 논점이 있었는데, 타이완 침공 작전과 한국전쟁의 중국 참전 문제였다. 그 중 타이완 공격의 경우, 바다를 넘어서 침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해공군의 부재를 이유로 중국은 공격의 시기를 연기하기로 6월 30일 결정한다. 당시 정세가 중국과 미국의 힘겨루기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타이완 침공이 연기되자, 결국 한국전쟁 개입을 통한 두 나라간의 충돌이 가시화되었다. 마오쩌뚱은 간부회의에서 미국의 군사력과 중국의 군사력의 역량을 비교하며, 미공군력의 우세와 원자폭탄 투여 위험성 등을 들며 참전 결정을 반대하는 의견들을 무릅쓰고, 동지 북한을 도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따라서 중공군의 한국 전쟁 참전이 기정 사실시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으로 돌아가자, 김일성·박헌영은 스딸린에게 소련군의 군사적 지원 내지는 인민민주주의국가의 국제의용군 부대 조직을 부탁하기에 이른다. 김일성·박헌영 역시 당시 냉전체제를 인식하고 있었던 바, 이의 의도는 소련군의 직접 개입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고, 중국군의 원조를 구하는 데 스딸린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바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스딸린은 북한의 지도자를 격려하며 진정시키면서, 중국 측에게 의용군 파견 요청 전문을 보낸다. 한편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을 골자로 하는 스딸린의 요청과 북한의 평양 특사 박헌영의 방문이 거의 동시에 닿게 된다. 이에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뚱의 강력한 의견 아래 한국전쟁 참전이 결정된다. 출병 신중론을 펼치는 많은 반대여론이 있었기에, 참전 결정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실제 참전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참전 여부 결정은 소련과 북한의 요청이 있은 직후인 10월 2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결정되었으나, 중국내부의 반대여론과 소련군의 공군 지원에 관한 논점들 때문에 실제로는 10월 19일에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에 들어오게 된다.
특히, 중공군의 참전에 대한 소련군의 장비 지원과 공군출동 원조를 둘러싼 두 나라 간의 협상으로 참전 시기가 늦추어졌는데, 저우언라이의 방소를 통한 외교활동과 마오쩌뚱의 소련군 지원여부를 떠난 강력한 출병 의지로 인해 소련 역시 군사 장비 지원은 물론 논점이 되었던 공군의 지원을 하게 된다. 단, 소련군이 참전하고 있음을 숨기기 위해 소련 공군 비행사는 중국 공군 비행복을 입고, 북한 마크를 단 기체에 탑승하는 조건하에서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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