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과한국전쟁] 중공군의 개입과 국제전(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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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분단과한국전쟁] 중공군의 개입과 국제전(37)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중국의 참전

한국전쟁이 시작되어 조선인민군의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동안 중국은 미국의 참전을 우려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군은 해공군의 부족으로 타이완 점령이 연기된 상태에서 막강한 공군력과 원자폭탄을 지닌 미군과 전쟁을 하게 되는 상황에 대하여 여러 가지 차원에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뚱은 내내 미국과 싸울수 있으면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원자폭탄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그의 의견이 전체적으로 강한 영향을 갖게 되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고 전황이 조선인민군에 불리해지자 김일성, 박헌영은 연명으로 스딸린에게 전보를 작성하여 10월 1일 슈찌꼬프를 통해 전달하여, 한미군이 38선을 넘게 된다면 이를 자력으로 막을 수 없으니 중국이나 그밖의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국제의용군을 조직하여 원조해주기를 부탁하게 된다. 이 당시 김일성은 소련군이 직접 전면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대신 중국군의 원조를 구하는데 스딸린이 영향력을 행사해주기를 바란 것이다. 이와 동시에 박헌영은 직접 중국인민해방군 출병 요청문을 가지고 북경을 방문하였다. 이와 동시에 스딸린은 슈찌꼬프를 통해 북한의 지도자를 격려하여 진정시키려 노력하였다.
북한과 소련의 요청에 의해 10월 8일 펑떠화이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 설립에 관한 명령이 내려졌다. 아울러 소련의 원조 및 공군지원 문제에 관해 상의하기 위해 저우언라이를 소련에 파견하였다. 스딸린은 중국의 출병을 전제로 장비제공에 관한 구체적인 제안을 하고 이후 몰로또프와 교섭하여 모든 전쟁에 대한 지원을 합의하였다. 중국이 장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참전을 결정하자 이에 소련도 이를 기뻐하여 소련 공군의 지원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의 참전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비행사에게는 중국 공군 비행복을 입히고, 기체에는 북한 마크를 붙인채 참가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0월 19일 중국군은 드디어 압록강을 넘어서 한반도로 진격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