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대상 선정 이유 및 전개 방향
II. 본론
2. 일대기 전반부 (출생~성진목장 경영)
2.1 출생과 성장
2.2 사업의 시작
3. 일대기 후반부(주 파스퇴르 우유 설립~민사고 설립 및 관리)
3. 1 파스퇴르 우유 창립
3.2. 정부 및 경쟁사와의 대결
3.3 민사고 창립시기
3.4. 말년
4. 최명재 경영의 긍정적인 평가
4.1. 남들보다 한발 앞서, 혁신의 정신
4.2. 발전을 위해 어디서든 배워오자, 벤치마킹
4.3. 협력자에 대한 신뢰
4.4. 뚝심과 결단력
5. 최명재 경영의 부정적인 평가
5.1. 독단적 경영
5.2. 네거티브 마케팅
III. 결론 및 의의
[참고문헌]
최명재는 경성전문학교 졸업 후에 한국상업은행의 말단 행원으로 입사했습니다. 한국상업은행은 (주)우리금융지주로 편입된 한빛은행의 전신입니다. 당시 전후 화이트칼라의 상징적인 존재가 은행원이었는데도 최명재는 ‘시간만 때우며 적당히 하는 것은 내 사전에 없다’라는 신념으로 당시 은행에 규정집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여 은행 업무를 통일하고 표준화하는 규정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도쿄은행과 미국의 아메리칸 뱅크의 규정집을 근거로 하여 한국 은행들의 특색을 가미하여, 규정집을 만들고 파격적인 승진을 하는 등 지점장으로의 승진을 보장받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월급쟁이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단정하고 1960년 가을, 은행을 그만두고 택시운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택시회사는 지입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최명재는 소유 자동차 없이 하루벌이 중 일정분의 사납금을 제하고 나머지의 몫을 챙기는 일당벌이에 불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어진 하루 20시간을 40시간 이상으로 활용하기 위해 합승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은행 대리 때보다 훨씬 높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고 2년 만에 개인 소유의 택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6년이 지나자 다섯 대의 택시를 보유한 ‘경영주’가 되었습니다.
이후 운수회사를 접고 해외(이란) 운수 용역업에 진출했습니다. 당시 이란의 석유 채굴권을 지배하고 있던 걸프사가 유럽으로부터 이란으로 실어 나르는 유전용 자재의 수송업자를 물색하고 있었고, 최명재 전 회장은 영국의 규격을 적용한 견적서를 제출했습니다. 한국인이 영국의 스탠더드를 이행할 수 있겠냐는 조롱과 의구심을 이겨내고 계약을 체결, 완수하였습니다. 최명재는 아내를 트럭에 데리고 다니는 영국의 운전사와 달리, 타국에 가서 고생하는 남편을 참고 기다리는 우리나라의 아내들이 한국 운전사의 경쟁력에 착안해 사업을 추진하여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고 있던 통역관의 배신으로 거래를 빼앗기고 남은 사업체를 정리하여 귀국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주 후 호메이니 회교혁명으로 팔레비 왕권이 붕괴되는 등 정세가 불안하게 되어서 오히려 철수하게 된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최명재 전 회장은 교육에 대한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이튼 학교와 같은 학교를 건설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학교가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재단이 튼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깨끗하고 수익성 좋은 기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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