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렌느 사건이 국내에 미친 영향 : 샹 드 마르스 광장의 발포 사건 (1791년 7월 17일)
3. 필니쯔 선언 (1791년 8월 27일)
4. 전쟁이냐, 평화냐 (1791년~1792년에 걸치는 겨울)
5. 선전포고 (1792년 4월 20일)
6. 군사적 실패 (1792년 봄)
7. 외부로부터의 위협 (1792년 7월)
8. 침략의 저지: 발미의 승리 (1792년 9월 20일)
9. 병합의 문제 (1792년 9월~ 1793년 1월)
10. 제 1차 대 프랑스 동맹의 형성 (1793년 2월~3월)
11. 뒤무리에의 패배와 반역 (1793년 3월)
1791년 6월 20일 한밤중에, 궁정하인으로 변장한 루이 16세는 가족과 함께 뛰일르리궁을 떠났다. 그러나 마차가 예정보다 5시간 이상 지체되었고 생뜨 무네르에서부터 루이 16세는 변장을 풀었으며 그로 인해 드루에(Drouet)라는 역장의 아들에 의해 발각되었다. 경종이 울리고 농민들이 떼지어 몰려들었으며 달려온 경기병들은 민중의 편에 가담해 버렸다. 22일 아침, 왕 일족은 주위의 여러 마을에서 달려온 국민방위대에 둘러싸여 다시 빠리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6월 25일 저녁, 죽음과 같은 침묵 속에서 국왕은 총을 거꾸로 멘 군인들에 둘러싸여 빠리에 되돌아왔다. 이것이 바로 ‘군주제의 장송행렬 (le convoi de la monarchie)'이라는 것이다.
탈주하기 전에 루이 16세에 의해 작성되어 프랑스인들에게 발표된 ‘성명’은 그의 의도를 뚜렷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그는 부이에 군 영내에 도착해 거기서 네덜란드에 주둔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빠리로 되돌아와 의회와 클럽을 해산하고 자신의 절대권을 재확립할 생각이었다. 루이 16세의 모든 비밀정책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들이는 데 있었다. 1789년 10월 경에 이미 루이 16세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에게 비밀첩자 퐁브뢴느(Fonbrune) 신부를 보내두었다. 그는 또한 알사스에 영지를 소유하고 있던 독일 제후들을 자극해 마찰을 일으키도록 손을 쓰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루이 16세는 단순하고 나약하며 주책없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국민에 대한 반역을 감수하면서까지 그의 절대권력을 재확립한다는 유일한 목적을 당성하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기울일 만큼은 총명했던 것이다.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