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아저씨처럼 서민적이고 친근한 분위기, 5년 전 만해도 누구도 쉽게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없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16대 대통령으로 당당히 당선되었다. 일명 ‘노사모’ 라는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의 대대적인 지지와 사랑은 민주당의 가장 강력한 이인제 후보와의 민주당 자체 공선에서 승리를 가져다 줄만큼 대단하였다.
이렇게 국민이 만들어준 노무현 대통령은 시작에서나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기존의 대통령들과는 많은 다른 점을 보일 줄로 생각된다. 실제로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그에 얼굴만큼이나 정치생활에 있어서도 굴곡이 많았다. 그 시작은 성공이 보장된 변호사의 생활로부터 일탈에서 시작된다.
성공한 변호사 노무현은 1981년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은 것을 계기로 새로운 삶의 전환을 맞는다. 이후 재야운동을 하던 노무현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시위현장을 주도하며 6월 항쟁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린다. 노무현은 본격적으로 정계로 진출하게 되는데 그는 13대 총선에서 1988년 5공 주역인 허삼수씨와의 선거전에서 승리한 노무현은 새로운 의정활동을 통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소망을 펼쳐나간다. 그 당시로는 이변이 아닐 수 없었던 결과에 모두들 놀라게 되는데 이러한 노무현의 가치는 5공 비리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청문회에서 유감 없이 보여지게 된다. 시청자들은 노무현의 증인신문을 보기 위해 때론 일손을 멈췄고 때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노무현은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역시 노무현속시원하다는 탄성이 이어졌다. 그런 그에게 고난의 길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찬란한 희망을 앞에 두고 있던 그에게 1990년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린 3당 합당은 그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많은 정치인들은 재선, 3선의 탄탄대로를 따라 약속을, 신뢰를 버리고 말았다. 모두가 민자당으로 들어갈 때 노무현은 외쳤다.해체 민자당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무현은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1992년 총선 낙선, 1995년 부산시장 낙선, 2000년 총선 낙선, 쉬운 길, 탄탄대로를 포기하고 가야 할 길, 역사가 부르는 길을 선택한 노무현, 그에게 지난 10년은 낙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시련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노무현은 시련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이제는 그 배운 것을 실현하려고 한다.
노무현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시절 자신은 링컨을 가장 존경하고 가장 닮고 싶은 대통령이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중들에게 밝혀왔다. 정치적 입지가 적은 그로서는 자신과 비슷한 환경을 가졌으면서도 미국에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되는 링컨을 내보임으로서 자신의 국정운영 능력을 간접적으로 보이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대통령이 되서도 노무현은 지속적으로 링컨에 대한 언급을 하게되고, ‘노무현이 만난 링컨’이라는 책을 내면서 구체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내비치게 된다. 우리는 노무현과 링컨의 리더십에 대해서 생각하고 비교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켄터키주(州) 호젠빌 출생이며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였기 때문에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지만, 독학하여 1837년 변호사가 되어 스프링필드에서 개업하였으며, 1834~1841년 일리노이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47년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미국멕시코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인기가 떨어져 하원의원직은 1기로 끝나고 변호사 생활로 돌아갔다. 1850년대를 통하여 노예문제가 전국적인 문제로 크게 고조되자 정계로 복귀하기로 결심하고, 1856년 노예반대를 표방하여 결성된 미국 공화당에 입당하여, 그 해 대통령선거전의 공화당후보 플레먼트를 응원함으로써 자신의 웅변이 알려지게 되었다.
1858년 일리노이주(州) 선출의 상원의원선거에 입후보하여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의 S.A.더글러스와 치열한 논전을 전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더글러스와의 공개논전에서 행한 갈려서 싸운 집은 설 수가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 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믿는다 는 유명한 말을 하여 더글러스의 인민주권론을 비판하였다. 선거결과에서는 패하였으나, 7회에 걸친 공개토론으로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고,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 받았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것은 노예제에 대한 그의 견해가 과히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 쪽에서 노예제 유지의 브리켄리지와 인민주권의 더글러스의 두 명의 후보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링컨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의 당선과 함께 남부 제주(諸州)는 잇달아 합중국을 이탈하여 남부연합국을 결성하였다. 링컨은 이미 노예제를 가지고 있는 남부 제주의 노예를 즉시 무조건 해방시킬 생각은 없었으나, 앞으로 만들어질 준주(準州)나 주(州)는 자유주의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186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하자 링컨은 나의 최고의 목적은 연방을 유지하여 이를 구제하는 것이지, 노예제도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주장하였으나, 4월 섬터 요새에 대한 남군의 공격으로 마침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중 그는 의회에 대하여 대통령의 권한 강화를 요청하고, 독재적 권한을 행사하여 인신보호령장의 정지, 언론집회의 자유의 제한을 강행, 반대당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여러 세력을 조정하여, 북부의 강경론자들을 누르면서 노예해방을 점진적으로 단행하는 것이었다. 전황은 처음에는 북군에게 불리하였으나, 1862년 9월 남군이 수세로 몰린 때를 노려 노예제 폐지를 예고하고 외국의 남부연합국 승인을 저지함으로써, 북부와 해외여론을 자기편으로 유도하여 전황을 일거에 유리하게 전개하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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