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2002년 12월 19일 노무현은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일각에선 “노무현은 불안하다” 다른 한편에선 “노무현만은 다를 것이다” 라는 기대 섞인 얘기 속에 참여 정부는 그 닻을 올렸다. 하지만 취임한지 50여 일이 지난 지금 대통령 자신이 “전 전권 (국민의 정부) 실패의 뒤를 밟는 것 같다” 라고 말해 주위의 우려를 자아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평소 노무현이 존경한다는 성공한 대통령 링컨에 대해 살펴보고 링컨의 리더십과 노무현의 리더십을 비교 분석해 볼 것이다. 또 노무현이 링컨과 같은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한 방법도 찾아 볼 것이다.
Ⅱ. 링컨과 노무현의 정치 리더십
1. 링컨의 정치자의 길
미국에서 최초의 대통령이 탄생한지 200주년이 되던 1989년 여론조사 전문가들이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을 조사한 결과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종합 1위를 차지했다. 그는 업적과 위기관리 능력, 성격과 도덕성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지도력과 정치력에서는 루스벨트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흔히 링컨을 남북전쟁에 승리해 미합중국을 유지하고 노예를 해방시킨 인물로만 알고 있지만 그는 민주주의를 웅변한 연설가였고 전쟁 중에도 끊임없이 유머를 구사했던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1809년 2월12일 켄터키주의 외딴 오두막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가난한 농부였고 어머니 낸시 행크스 링컨은 미혼모의 딸이었다. 부모는 둘 다 문맹이었다. 링컨이 9세 되던 해 어머니 낸시 행크스는 부자나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 책을 읽는 사람이 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이 시절 링컨이 책 한 권을 빌리려고 먼 길을 걸어다니곤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20세가 넘도록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했던 링컨은 한때 그가 점원으로 있던 방앗간과 상점을 인수했지만 곧 1100달러의 빚만 지고 파산해버렸다. 그 당시엔 파산한 사업자는 다른 지역으로 떠나기만 하면 채무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링컨은 샐럼에 남아 우체부며 울타리 만드는 일 등을 닥치는 대로하며 빚을 갚아갔다. 이 일 때문에 링컨은 정직한 에이브(Honest Ave)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25세 되던 해 일리노이주 휘그당 의원으로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미국멕시코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인기가 떨어져 하원의원직은 1기로 끝나고 변호사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1852년 한 권의 소설이 미국과 유럽을 떠들썩하게 했다. 노예들의 비참한 삶을 고발한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은 미국과 유럽에서 130만 권 이상 팔리는 초 베스트셀러가 됐다. 북부 사람들은 이 소설에 환호했고 남부인들은 이 소설이 양키(북부인을 얕잡는 말)들의 거짓말이라고 비난했다. 점차 노예제도를 둘러싼 대립이 점점 심각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링컨은 다시 정치에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1854년 링컨의 정적 스티븐 더글러스는 노예제를 주민투표에 부치는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을 제정한다. 대통령을 꿈꾸고 있던 더글러스는 남부와 서부의 표를 모두 잃지 않기 위해 이런 법을 만들었다. 이때 링컨은 스프링필드에서 노예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피오리아 연설을 한다.
노예제도는 인간의 이기심이 낳은 산물이다.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것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 연설로 링컨은 삽시간에 전국적인 인물로 부각된다. 뒤이은 연방의원 선거에서 링컨은 더 많은 표를 얻고도 더글러스에 패배하지만 1860년의 대통령선거에서는 더글러스의 민주당이 분열한 덕분에 40%가 못 되는 표를 얻고서도 대통령에 당선된다.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의 주들은 그가 취임하기도 전부터 잇달아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남부연합과 연방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링컨은 전쟁에 뛰어나지 못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링컨의 연방군이 남부군보다 훨씬 뛰어난 경제력과 병력, 무기를 갖추고도 4년 동안이나 전쟁을 끌었던 일을 지적한다. 전쟁 중 당시 중심도시였던 뉴욕에서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폭동이 일어났고 연방군 장군들은 부패 스캔들에 휩쓸리기도 했다. 그러나 링컨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늘 포용력을 발휘했다. 전쟁의 목적이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이 나라의 분열을 극복하고 화합과 번영을 만드는 것임을 잊지 않았다. 링컨은 그의 내각에 대통령선거전에서 경쟁상대였던 상대당의 인물들까지도 끌어들였다.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인물이면 민주당 출신이라도 기꺼이 기용했다. 심지어 전쟁이 막바지에 달했던 1864년의 대통령선거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민주당의 앤드루 존슨을 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전쟁 이후의 국민 화합을 위한 그의 결단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다.
링컨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연방 재건을 막 시작하던 때인 1865년 4월14일 저녁 워싱턴DC의 포드극장에서 존 윌크스 부스의 총탄을 맞고 다음날 아침 사망한다. 그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 전 남부연합 대통령은 링컨의 장례식에서 그의 죽음은 남부가 겪은 일 중 남북전쟁의 패배 다음으로 가장 암울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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