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과 노무현의 정치적 리더십 비교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길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길...-
1.서론
링컨과 노무현은 왜 연관지어지는가?
역사속에서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지도자들은 링컨 왜에도 많이 있다. 그런데 굳이 링컨과 노무현이 연관되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아마도 두명의 전 현직 대통령이 몇가지의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그리고 언젠가 노무현 대통령이 링컨 같은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것도 큰 이유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나는 여기서 두 인물의 정책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가 아니라 두 인물의 살아온 과정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속에서 나타난 리더십을 분석해 보고 노무현 대통령이 후일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기 위해 어떻게 5년을 꾸려나가야 하는 지에 대한 나의 짧을 소견을 덧붙여 볼까 한다.
2.본론
1>링컨의 삶
*링컨
켄터키주(州) 호젠빌 출생.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였기 때문에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지만, 독학하여 1837년 변호사가 되어 스프링필드에서 개업하였으며, 1834~1841년 일리노이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47년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미국멕시코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인기가 떨어져 하원의원직은 1기로 끝나고 변호사 생활로 돌아갔다. 1850년대를 통하여 노예문제가 전국적인 문제로 크게 고조되자 정계로 복귀하기로 결심하고, 1856년 노예반대를 표방하여 결성된 미국 공화당에 입당하여, 그해 대통령선거전의 공화당후보 플레먼트를 응원함으로써 자신의 웅변이 알려지게 되었다.
1858년 일리노이주(州) 선출의 상원의원선거에 입후보하여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의 S.A.더글러스와 치열한 논전을 전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186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하자 링컨은 나의 최고의 목적은 연방을 유지하여 이를 구제하는 것이지, 노예제도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4월 섬터 요새에 대한 남군의 공격으로 마침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중 그는 의회에 대하여 대통령의 권한 강화를 요청하고, 독재적 권한을 행사하여 인신보호령장의 정지, 언론집회의 자유의 제한을 강행, 반대당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여러 세력을 조정하여, 북부의 강경론자들을 누르면서 노예해방을 점진적으로 단행하는 것이었다. 전황은 처음에는 북군에게 불리하였으나, 1862년 9월 남군이 수세로 몰린 때를 노려 노예제 폐지를 예고하고 외국의 남부연합국 승인을 저지함으로써, 북부와 해외여론을 자기편으로 유도하여 전황을 일거에 유리하게 전개하는 데 성공하였다. 1863년 11월 게티즈버그국립묘지 설립 기념식 연설에서 유명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불멸의 말을 남겼다. 전쟁 중인 1864년의 대통령선거에서는, 재선 전망이 불투명하였으나, U.S.그랜트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승리가 계속된 것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해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1865년 4월 9일 남군사령관 R.E.리가 애포매턱스에서 그랜트에게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은 종막을 고하였다. 전쟁이 종막에 가까워짐에 따라 관대한 조치를 베풀어 남부의 조기 연방 복귀를 바랐으나, 남군 항복 2일 후인 4월 14일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연극관람 중 남부인 배우 J.부스에게 피격, 이튿날 아침 사망하였다.
2>링컨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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