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계 소설 심청전을 읽고 - 심청전 새롭게 바라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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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을 읽고
- ‘심청전’새롭게 바라보기 -
1. 들어가며
심청전 속의 가장 중요한 두 인물 심청과 심봉사. 일단 심청을 떠올리면 당연히 따라붙는 수식어가 바로 ‘효녀’이다. 역시 나에게 있어서도 심청은 ‘국민효녀’였다. 문근영을 ‘국민여동생’, 유재석을 ‘국민MC’라고 부르는 것처럼, 심청 또한 모두가 인정하는 효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심청의 아버지 심봉사. 심봉사를 떠올리면 앞이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온전치 못한 몸으로 심청을 잘 키워낸 대단한 아버지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가 그동안 너무 틀에 박힌 생각으로만 심청전을 읽었기 때문이 아닌가. 눈 먼 아버지를 위해 제물이 되어 죽으러 떠나는 심청을 두고 예로부터 하늘이 내린 효녀라고 칭송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을 한 심청이 정말 효녀일까? 그리고 심봉사는 정말 한없이 불쌍하고 가엾기만 한 사람이었을까? 정말 부정(父情)이 넘치는 아버지였을까? 비록, 과제를 하기 위해서 였지만 다시 읽게 된 심청전은 나에게 심청과 심봉사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했다.
2. 심청은 정말 효녀였을까?
눈 먼 아버지를 위해서, 아버지가 세상을 환히 볼 수 있게 해 드리려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리려 했던 심청. 과연 이것이 심청의 진심이었을까? 설사, 이러한 행동이 진심에서 우러나왔다고 하더라도 나는 심청이 효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심청은 공양미 삼백석이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말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덜컥 믿어버린다. 물론, 아버지인 심봉사가 스님에게 공양미 삼백석을 시주 하겠다고 약속을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도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살림에 공양미 삼백석이면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재물을 요구하는 것임을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책임져 왔던 심청은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재물을 요구할 때에는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의심해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아버지가 확실히 눈을 뜬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공양미 삼백석을 위해 무턱대고 인당수에 뛰어들어 제물이 된 것은 어떻게 보면 심청이 아버지를 버린 격이다. 자신이 죽은 후에 아버지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단순히 자신이 죽은 후에 공양미 삼백석을 얻어 시주를 하면 스님의 말대로 아버지가 눈을 뜰 것이고, 눈을 뜬 아버지는 행복하게 잘 사실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무책임하다고 본다.
이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심청의 아버지에 대한 책임회피라고도 볼 수 있겠다. 여태까지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위해 살아온 심청이 이러한 자신의 생활에 점차 지쳐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환경이 환경인지라 어렸을 때부터 일찍 철이 들어 자신을 꾸미기는커녕 자신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항상 아버지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며 아버지를 위해 살아온 심청은 이러한 생활이 지겨워지고 싫어졌을 수도 있다. 그래, 심청은 ‘효녀’이기 전에 ‘소녀’였다. 아무리 일찍 철이 들었다고 해도, 아버지만을 생각해왔다고 해도 소녀는 소녀이다. 어찌 마음속에 불평, 불만이 없었겠는가. ‘후에 아버지는 어떻게 되던지 상관없이 자신이 죽으면 된다.’라는 생각이 심청의 마음속에 아주 잠깐이나마 자리 잡고 있었을지도. 이렇게 생각한다면, 심청은 정말 이기적인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또한,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불효이다. 아무리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자식이 아버지보다 먼저 죽는 것은 아버지에게 엄청난 괴로움과 자책감을 줄 것이다. 설사, 아버지가 눈을 뜬들 자식을 죽여서 얻은 것인데 정말 진심으로 기뻐 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결코 기뻐할 수 없을 것이다. 기뻐하기는커녕 슬픔에 젖어 몸져누웠을지도 모르는 일.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아버지가 자신을 가슴에 묻어두고 평생을 자책하며 살게 만들 뻔 했으니 심청은 효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3. 심봉사는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심봉사는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한 집안의 가장으로써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심봉사는 굉장히 무능력한 아버지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심봉사는 정말 일을 구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다. 나는 심봉사가 일을 구하려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미 심청이 일을 하며 집안 살림을 이끌어나가고 있었고, 자신이 굳이 일을 하여 돈을 벌지 않아도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닐까? 그러한 것이 아니라면, 어떠한 아버지가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고생하며 일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앞을 볼 수 없는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전문적인 직업을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특히 동양에서는 장애조차도 하늘의 섭리이며, 한 가지가 모자라다면 그 대신 다른 한 가지가 뛰어나게 마련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심봉사가 심청을 조금 더 생각해주고, 고생하는 딸을 위해서라도 일할 마음만 있었다면 그 어떠한 것이라도 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심봉사는 일찍 아내를 잃고 어린 심청을 젖동냥으로 키운다. 어쩌면 심봉사가 어린 심청을 힘들게 젖동냥으로 키운 것은 순수한 부정(父情)에 의해서 라기 보다는 몸이 불편한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심청을 키우면서 일종의 보상이나 대가를 기대한 것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심청이 어느 정도 자라면 자신이 그동안 심청을 힘들게 키웠으니 이제는 심청이 자신을 뒷바라지하고 부양할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