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생애
전남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에서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살길을 찾아 일본에 건너갔던 그의 아버지는 해방 후 귀국했으나, 특별히 하는 일없이 소일하며 늘 술에 취해 살았다. 어린 아들에게 “너무 허망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가 13살 때 운명하였다. 그의 시적 정서의 토대가 된 감성적 기질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이며, 후의 아버지의 부재는 그의 심성을 관조적인 것이 되게 했으며, 그 관조는 거시적 안목으로 옮아가 시적 풍격의 형성에 이바지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을 조그마한 어촌에서 보냈고 철이 들 무렵 광주로 이사를 했는데 4년 정도나 뒤늦은 출생 신고 때문에 취학을 할 수 없어서 또래들이 4학년이 되었을 때에서야 1학년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전, 2년 동안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게 된 것은 입학전의 이러한 공백기 탓이다.
광주서석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입학자격검정고시에 합격하여 광주서중으로 진학했다. 중학시절 박성룡은 풍경화 그리기에 몰두하던 화가 지망의 소년이었다. 어린시절 그의 그림 그리기 체험은 그의 시에 영향을 주어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시적 이미지의 능숙한 사용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광주고와 중앙대 영문과로 진학했고 대학교는 가난해서 등록금의 압박으로 인해 중퇴하였다. 그가 문학청년기를 보낸 1950년대를 전후한 기간동안 광주에는 피난 온 서정주, 김현승 등이 머물고 있었는데, 이들 밑에는 시작의 열정을 지닌 많은 문학지망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박성룡도 그들 중 하나였다.
『문학예술』지에「교외」(1955),「화병정경」(1956) 등으로 조지훈과 이한직의 추천을 통하여 시단에 등단하였다. 조지훈의 이래적인 칭찬은 그에게 큰 격려가 되어주었다. 1962년 1월, 정한모교수의 소개로 만난 카톨릭신자인 이애영여사와 결혼하고, 자신도 세례명을 받았다.
박성룡은 오랜 기간 언론사에 봉직했다. 출판사와 신문사를 전전하다가 서울신문 문화부에서 문학 미술담당 기자와 부장으로 정년을 맞고 퇴임하기까지 그는 출판 언론계 주변에서 30여년을 몸담았다. 앞서 말했듯이 평소 그림을 좋아했고 이에 대한 안목도 남달라 그림에 대한 감상의 글을 많이 썼다. 40여 년 시작 활동 기간동안 개인 창작시집으로는 모두 6권을 남겼다.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1969),『춘하추동』(1970),『동백꽃』(1977),『휘파람새』(1982),『꽃상여』(1987)『고향은 땅끝』(1991)이 있으며, 산문집으로는 『시로 쓰고 남은 생각들』(1978)을 남겼다.
Ⅱ. 시적 변모과정과 작품해석
1. 초기시 - 자연에 대한 섬세한 통찰의 세계를 이미지로 치환
자연을 제재로 한 깊이 있는 통찰의 시, 정치한 이미지 단단한 구조력의 시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1969),『춘하추동』(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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