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옥타비오 파스]
1. 요약 정리
옥타비오 파스는 이미지의 다양한 의미들 중 크게 두 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미지는 상(像)의 의미, 혹은 상상력을 통하여 상기하거나 만들어내는 실재적 혹은 비실재적 모습을 뜻한다. 즉 이미지들은 상상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미지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정의는 아니다. 이미지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모든 언어적 형태, 즉 시인이 말하는 구와, 이것들이 모여서 시를 구성하는 구들의 총체인 것이다. 특히 이미지는 대립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소들을 가깝게 접근시키거나 결합시킨다.
그는 돌의 무게와 깃털의 무게를 두고 킬로그램이라는 추상적인 수치로 환원될 수 없는 사물의 질적 특성과 자율성에 대해 언급한다. 추상적 수치로의 환원이 갖는 통일적 기능은 그러한 질적인 특성들과 자율성을 망가뜨리고 빈약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반면 시인은 이미지를 사용해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이다’라는 모순의 원리에 도전함으로써 물의를 일으킨다. 시적 현실은 옳고 그름을 지향하지 않듯이, 시인이 대립되는 것들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 토대를 흔들기에 충분하다. 시는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를 말한다. 시의 왕국은 존재의 왕국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왕국이다.
파스는 이미지가 철학적 권위를 회복하려는 변증법적 논리에 의거하여 전개되는 듯 하나 본질적인 과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가령 변증법적 과정에서의 돌과 깃털은 돌도 아니고 깃털도 아닌 제3의 현실을 위하여 사라지지만, 이미지는 과학이 요구하는 양적 환원도, 헤겔의 변증법이 요구하는 질적인 변화도 없이 돌과 깃털은 여전히 돌과 깃털인 것이다. 게다가 돌은 돌이면서 깃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약을 가진 이미지는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며, 동시에 이것은 곧 저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변증법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지는 물의를 일으킬만한 도전이며 사유의 법칙을 침해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변증법은 이미지를 실재하는 사물이나 현실을 설명해주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판단한다. 변증법은 정(正)과 반(反)을 동시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긍정과 부정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개념 자체를 말살해버린다. 이것이 변증법의 모순 법칙인데, 이미지는 이러한 법칙을 뛰어넘기 때문에 변증법은 이미지를 비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파스는 A와 B의 상보적 기능을 설명하면서 이미지에 대한 설명을 보탠다. 여기서 말하는 상보성의 원리는 양자 간의 상호 의존성을 강조하면서 각각의 개념이 상호 직접적이고 모순적인 관계 속에서 의지하고 있는 상대 속에서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부정과 긍정, 이것과 저것, 돌과 깃털은 동시적으로 그리고 상대의 상보적인 기능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대립되는 것들의 역동적이면서 필연적인 공존, 이는 각각의 특성을 환원시키는 것도, 변형시키는 것도 아닌 화해하는 것으로 어떠한 서양의 사유도 뚫고 지나가지 못하는 벽이 된다. 파스는 서양의 관념들이 시를 추방하여 결국 유아론으로 그치고 말았다고 비판하면서 이러한 서양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인 동시에 이중적 의미의 탈선의 역사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파스는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서양이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공존과 화해, 상보적인 기능으로 작용하는 시의 이미지를 간과해버린 서양의 관념들과는 달리 동양적 사유에서는 ‘타자’에 대해서 공포감을 갖지 않는다. 서양은 ‘이것 아니면 저것’의 세계이지만 동양은 ‘이것 그리고 저것’ 심지어 ‘이것이 저것’이 되는 세계이다. 이는 너와 나를 모두 긍정하는 원리로 이것과 저것 사이의 대립이 상대적이면서 필연적이지만 배타적으로 보이는 용어들 사이에 적의가 사라지는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파스는 장자의 말을 인용하여 돌과 깃털, 이것과 저것이 합일되는 순간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순간은 매 순간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즉 분출, 샘, 실존의 한복판에서 혹은 살아 있는 매순간의 한가운데서 돌과 깃털,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모든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모든 지식을 포기하면 더 가벼워진 자신을 느끼게 되고, 이러한 텅 빈 진리의 시선을 마주할 때 우리는 가장 안정된 정신을 구가할 수 있고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그는 탄트라 불교의 체계를 거론하면서 육체는 우주의 은유이자 이미지로 작용하고, 육체의 경락은 에너지의 매듭으로서 별자리, 혈액, 신경의 흐름이 합류하는 곳으로 파악한다. 사유와 삶이 개별적 우주가 아닌 연통관(連通管)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유가 가능한 것이다.
또한 파스는 동양적 전통에서의 진리는 개인적 경험이라고 말한다. 각자 스스로 해 나가야 하는 진리의 탐구는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체험적 앎으로서 너털웃음, 미소 혹은 역설로 표현되는 깨달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파스는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는 장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모든 앎이란 앎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知不知)으로부터 시작하며, 말이 숨기고 있는 의미에 바로 말의 가치가 있다고 언급한다. 즉, 대상은 말 너머에 있는 것이다.
모든 의사소통의 체계는 지시체들과 그 의미들의 세계 안에서 가능하다. 산문의 경우는 의미를 통하여 구의 통일성이 이루어지지만 시의 이미지는 의미의 다원성이 사라지지 않는 구로 이루어진다. 이미지는 모순도, 무의미도 아니다. 이미지는 이러한 비일관적인 명제들을 훨씬 뛰어넘는 통일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미지의 의미는 무엇일까? 파스는 이미지가 진정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가 유효한 객관적 실재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이미지는 시인의 비전과 경험에 대한 진솔한 표현이며, 스스로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파스는 시적 이미지들에 대한 여러 주장이 객관적 근거를 갖는지, 시적언어의 외견상 모순이나 무의미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언어의 근거이자 동시에 실재를 포착하는 ‘의미’를 다양한 성질과 형태의 모순적인 총체를 통일시키는 요소로 파악한다. 그에 비해 실재에 대한 우리의 모든 해석들은 표현하고자 의도하는 것을 재창조하지 않고 그것을 표상하거나 묘사하는 데 그친다. 그렇게 세부적으로 들어가 우리의 지각을 묘사하다보면 대상의 총체성은 점점 상실되고 만다. 그러나 이미지는 한 번 걸러서 재현(representar)하는 것이 아닌 그대로 현시(presentar)하면서 우리의 경험을 재창조하며 되살린다. 즉 시는 우리가 잊고 있는 것, 진실한 우리 자신을 기억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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