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 제주도 현장답사
제주목 관아 관덕정에서부터 시작한 현장답사. 제주목은 조선시대 때 정부에서 제주도 전체를 관리하던 곳으로 지금의 관덕정을 포한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탐라국 시대부터 관아시설이 있었던 것을 추정된다. 관아시설은 1434년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 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 1435년에 골격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사용을 하다가 일제강점기 때 심하게 훼손되어 버렸다. 일제강점기 때도 거기서 관리업무를 보았지만 그들이 쓰기 편하게 바꾸는 바람에 예전 모습을 잃어버렸다가 1993년에 다시 복원사업을 시작해 2002년 12월에 복원을 완료하였다. 하지만 그 복원 방식에 있어서 충분한 자료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복원이 시작되면서 사용된 나무나 만들어진 방식이 육지의 관아와 같게 만들어 한계가 보인다. 게다가 제주목 관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어 있지 않아서 그 곳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배경지식이 없다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항몽 유적지는 고려시대 때 삼별초가 원나라에 항쟁을 하면서 제주도까지 내려와 토성을 쌓은 유적을 토대로 만든 곳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곳에 박물관은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싶었던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그림에서는 최선을 다해 항쟁하는 용감한 고려 삼별초 군사들과 그들에게 힘을 보태주는 제주도민들의 모습, 그리고 원나라 군사들과 끝까지 싸우는 맹렬한 모습을 그리고 있고, 결국 원나라 군사들이 제주도민들을 탄압하고 괴롭히다가 마지막엔 고려군사들이 와서 구원해주는 그림으로 끝을 맺는다. 즉 제주도는 대한민국이며 힘을 합해 어려운 난관을 이겨내고 나라에 대한 충성을 할 때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신앙적인 국가관을 심어주기 위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역사사료를 보면 그 내용은 그리 간단하게 볼 문제가 아니다. 삼별초가 내려왔을 때 제주도민들은 원래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 힘들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삼별초 군인들이 본인들의 군량미를 위해 도민들이 먹을 것들은 빼앗고 심지어 토성을 쌓는데 강제 동원하여 괴롭혔다. 그러다 삼별초가 패한 후 몽골사람들이 내려와 제주도에서 말을 키우며 본국으로 말을 보냈는데, 그 당시 몽골사람들이 여성을 데리고 오지 않아 자연스럽게 제주도사람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제주도에서 묵호들로 100년을 살아온 원나라 3세-4세들은 이미 제주도에 정착을 해 제주도사람들과 함께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고려군사들이 그들을 내쫓고 제주도를 되찾았을 때 제주도민들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그것은 좀 더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모충사는 의병항쟁 기념탑과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 의녀반수김만덕의인묘비가 있는 곳이다. 모충사도 박정희 시절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이념을 심고 싶은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름에서도 보여주듯 모충사는 사모하고 충성을 하는 사원으로 선현들의 거룩한 뜻과 애국, 애족의 희생정신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기 위해 만든 사원이다. 조봉호 선생은 기독교 목사로 1912년 교회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립희생회 제주지방 조직을 강화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옥사했다. 그 충절의 마음을 기리고자 기념비를 세웠다. 의병항쟁기념탑은 제주도에서 의병항쟁을 일으킨 고사훈, 김석윤, 노상옥 등이 무기를 제작하고 의병을 모집하고 거사를 준비했다. 그것을 기리고자 의병항쟁기념탑을 세웠다. 마지막으로 의녀반수김만덕의인묘 탑은 1794년 제주에 극심한 흉년으로 많은 도민들이 굶주리게 되었을 때 김만덕이 본인의 많은 재산으로 도민들을 구한 것을 정조가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의녀반수의 직함을 주고 궁에 오게하여 직접 그 공을 높이 칭송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제주도 사람이라는 것과 어려운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애국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념탑의 높이나 규모에 비해 너무 내용조사가 빈약하고 부연설명이 부족해 급하게 만든 느낌이 많이 들었다. 또한 거의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방치되어 있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곤을동 마을터는 4.3사건 때 사라진 마을 중 하나로 제주도의 아픔을 적나라케 보여주는 장소였다. 2002년 당시 표석에는 초토화 작적인 군인에 의해 벌어진 사건임을 명기하지 않았는데, 이에 곤을동 출신 주민들의 반발로 표석을 세우지 못하였다. 결국 군인에 의해 곤을동이 초토화되었다는 문구를 삽입한 후, 2003년 4월 3일 표석을 세우게 되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나라 또한 역사에 관해서 은폐하고 조작하려는 모습들이 있어 더 깨어서 객관적인 사료들을 연구하며 역사적 사건을 바라볼 필요를 느낄 수 있었다.
제주도에는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법정사항일운동 이렇게 3대 항일운동이 있다. 그 중 조천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에 항일기념관이 세워졌다. 하필이면 왜 조천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조천에 항일기념관이 생겼을까? 첫째로 설립기획 당시 조천사람들의 돈이 가장 많고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둘째로 해녀항일운동과 법정사항일운동은 상대적으로 대표적으로 내세우기에는 좀 그 성격이 문제가 있었다. 해녀항일운동은 사실 알고 보면 수산물가격에 대한 문제로 인해 생긴 것이다. 그래서 그 가격을 인상하기 위해 운동을 벌이는데 당시가 일제강점기라 관리가 일본인이라는 점에서 항일운동이 되었다. 또한 법정사항일운동은 종교적인 성격을 너무 많이 지니고 있어서 전도민의 공감대를 이루는데 부족함이 있었다.
제주도는 전체적으로 사료가 부족하다. 역사적 사료가 부족한 가운데 그것을 모으기 위한 노력이 충분하지 않은 가운데 기념관과 박물관이 늘어나면서 그 볼거리나 읽을거리가 빈약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또한 그 당시의 사건을 기록하는 데 중점을 두기보다는 지금 필요한 부분만 겉으로 드러내 파편적인 내용으로 역사를 볼 수 밖에 없게 만든 것 같아 아쉬웠다.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