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원령공주 princess mononoke 를 보고
우리시대 최고의 애니메이션 감독이라고 생각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그의 영화에선 아이들의 흥미를 중심을 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당대 사회의 문제점에 대하여 경각심과 가르침을 일깨워 주는 주제로 인하여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 중에서도 원령공주, 모모노케 히메를 가장 좋아한다. DVD도 소장하고 있고 1년에 한번씩은 꼭 찾아서 볼 정도로 이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이 영화는 200억 원의 제작비가 들었으며, 제작기간은 3년이 걸렸다. 시대극이자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전환을 보였던 작품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한 대작이라는 점에서도 경제학적인 해석도 가해졌던 작품이다. 이로 인해 1997년에 베를린국제영화제 특별상과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최우수영화음악상을 수상하였을 정도로 명성이 높은 영화이기도 하다.
‘원령공주’는 그가 1997년에 상영한 영화로 고대 일본 시대에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는 주인공 ‘아시타카’와 자연의 편으로 훼손하려는 자를 벌하려는 ‘원령공주와 자연신’들, 인간의 생존과 발전을 목표로 자연을 개발하고 마을의 풍요를 원하는 ‘에보시’, 이 3명의 특징적이고 다른 목적을 추구하며 근대화의 과정에서 숲을 파괴하려는 인간과 이를 지키려는 신과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을 그렸다.
이 영화에선 인상적인 부분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증오’이다. 영화 초반부와 중 후반부에서 맷돼지신들이 상처를 입어 자신의 이성을 잃고 재앙신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그렇지만 깊은 상처를 입은 신이 하나 있는데, 바로 들개신 ‘모로’이다. 왜 동일하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쪽은 재앙신으로, 다른 한쪽은 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원한’이었다. 맷돼지신들은 신들인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인간들을 증오하고 원망하였고 이 원망의 씨앗이 심어지자 급속도로 재앙신이 맷돼지신들의 몸을 뒤엎었다. 반대로 들개신 ‘모로’는 인간을 원망하였으나 복수하고 저주하려는 마음대신, 자신의 임종을 숲 안에서 조용히 기다린다. 그리고 재앙신이 되는 과정은 한순간이고, 주변의 생명까지 재앙신으로 뒤덮어버리는 점에서 ‘증오’의 씨앗은 한번 심어지면 겉잡을 수 없이 커지고 나 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영화를 보면서 선과 악의 구분이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주인공인 ‘아시타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이자 들개의 신인 ‘모로’에 위협을 가하는 자연개발에 대하여 경계심을 항상 늦추지 않는 원령공주, 일본 마을의 족장이며 철을 생산, 개발하여 다른 인간 또는 신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부족민들을 보호해야하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에보시’ 등 서로의 입장에서 대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나며 ‘나라도 저런 상황이면 저런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겠구나’ 라고 생각하였다. ‘에보시가 악역이다. 에보시가 자연을 훼손하기 때문에 이 일이 벌어졌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극중에서 보면 에보시부족의 사람들 구성원이 아주 톡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성들의 수보다 여성들의 수가 많고, 남성들을 보면 모두 마르고 능력없는 사람들만 있다. 그리고 문둥병 환자들이 모여 총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부족민들은 하나같이 사회적으로 보았을때 사회적 약자의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부족인 에보시는 이 사회적 약자들을 이끌어 주는 ‘정의로운’ 존재였던 것이다. 에보시가 없으면 이 마을은 분명 중심을 잃고 쓰러질 것이고, 이 마을의 부족민들은 다시 사회적 약자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에보시는 마을의 번영을 위해 철을 얻기위해서 자연을 개발해야 했고 이를 지키려는 자연신들과 싸워야 했다. 어찌 에보시는 악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영화에선 서로의 입장에서 그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충분히 제시하며 절대적인 선도, 악도 없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로, 이 영화는 다소 잔인하다. 초반부에 아시타카가 자신의 사슴인 야쿠르를 타고 약탈을 하고 있는 사무라이를 활로 쏘는 장면이 있는데, 활을 맞은 사무라이들은 팔이 잘려나가고, 목이 잘려나간다. 이러한 장면을 하야오는 서슴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도 전투장면을 보면 동물이든 인간이든 모두 피범벅이 된 채로 죽고 부상을 입는다. 이제 성인이 된 나에겐 그리 자극적이진 않았지만, 영화의 주 관람객이 아이들이라는 점에서 보면 하야오의 생각이 의심되곤 했었다. 그리고 내 생각과 비슷하게 하야오도 이런 장면 때문에 주변에서 질타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하야오는 ‘자신의 영화에서 동심보다는 현실성을 느꼈으면 한다.’라고 하면서 질타어린 시선을 반박했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아이들에게 동심을 잃지않게 만화를 제작할 수도 있지만 동심에서 벗어나 조금 더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부분도 필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잔인한 부분까지 메시지를 담고 있는건 아닐까.
네 번째로 자연의 웅장함이다. 자연은 아름답고 웅장하다. 그렇지만 그림으로 담기엔 힘들다. 어찌 자연의 거대하고 웅장한 모습을 한폭의 그림으로 담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하야오는 해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자연이 배경으로 나오면 감탄사를 금치 못했다. 보는 내내산의 기품있는 모습과, 고목들의 우직함, 시냇물의 청아함, 동물들이 담고 있는 순수함과 분노까지 더불어 탄성을 자아냈다. 는 자연을 모두 담아냈다. 하야오는 실로 대단한 인물이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장면에서 보면 아시타카와 원령공주는 서로 호감을 느끼지만 ‘아시타카를 좋아해 하지만 인간은 용서할수 없어.’ 라며 인간을 용서할 수 없는 원령공주는 아시타카를 뒤로 한 채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 장면에서 결국 인간과 자연은 공생할 방법이 과연 없는걸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아시타카가 ‘넌 숲에서 난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자. 야쿠르와 함께 놀러갈게.’ 라고 말하며 인간과 자연의 공생에 대하여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아시타카가 극초반부에 재앙신에 의해 저주가 걸린 손이 시시신에 의해 저주가 풀리는데 손에 보면 흔적은 남아있다. 증오와 원한은 풀려도 앙금은 남는다는 하야오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자연과 인간의 공존. 가장 어렵지만 우리가 꼭 해내야 할 과업이다. ‘인간은 숲과 같이 살아가고 숲이 죽으면 같이 멸망한다.’ 라고 말하는 들개신 모로가 했던 말처럼 숲을 지키고 인간과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이다. 거창할 수도 있지만 인간과 자연의 공존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꾸어본다.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그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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