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육] 한국 에큐메니컬운동사 - 남부대회와 에큐메니즘(설립, 해산,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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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 에큐메니컬운동사 - 남부대회와 에큐메니즘
들어가는 글
남부대회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에서 설립된 최초의 개신교 연합기구라 하겠다. 이것은 8.15 해방 직후 초교파적으로 구성된 연합조직이었으며,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 교회를 강제적으로 연합하려 했던 것이었다면, ‘남부대회’는 자율적으로 통합하려 했다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남부대회는 구성원들 간의 의견차, 서로 다른 정치적 욕망, 그리고 리더십 안에 여전히 남아있던 친일적인 인물들로 인해 지속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대회가 설립, 해체되는 과정을 통해 조금은 다른 형태의 에큐메니즘이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본 발제 문을 통해 남부대회가 남긴 에큐메니즘 적 형태들은 살펴보겠다.
남부대회의 설립
남부대회의 역사적 연원은 1945년 7월 19-20일에 결성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있다. 총독부에 의해 임명받은 형태로 임원에 선출되었던 일본 기독교조선교단 지도자들은 대체로 통합된 교단형태로 교회의 정체를 존속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덕주, “남부대회의 조직과 소멸”, 제30권, 2004, 23쪽.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통합된 교단형태를 지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교파로 돌아가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해방이 되자마다 장로교회는, 평안도 지역 노회부터 노회재건을 서둘러 ‘조선교단’의 통합 조직을 무색하게 했고, 그 해 9월 24일에는 북한의 감리교 지도자들도 평양에 모여 ‘서부연회’를 제조직함으로써 교파 환원의 서막을 올렸다. 이러한 분위기는 남한 지역으로까지 바로 확산되어 나갔다. 서정민, “일제 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형성과정” 제16호, 2002.
Facts Concerning the Korean Union Church Ilbon Ki Dok Kyo Dan - The Korean Church Group of the Japanese Christianity. 부록2: “조선연합교회에 관한 사료”, 번역.해제: 서정민 제16호, 2002.- 조선연합교회에 대한 선교부보고문서이다. 이하 FCKUC.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은 남부대회로 탈바꿈을 시도했다. 이들은 “신문로 새문안교회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간판을 바꾸어서 [조선기독교단]이라는 새 간판을 걸어” 나사행, “한국감리교교회성장사(광복후편)”, 기독교대한감리회ㅣ 교육국, 1987, 112쪽.
놓는 일로부터 착수하였고 1945년 9월 8일에 [남부대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 개회 벽두에 수십 명의 감리교 대표자들은 감리교의 재건을 선언하고 퇴장함으로 처음 계획대로 치러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감리교의 일부 인사들을 제외한 교단 관계자들은 남부대회를 명실상부한 교회 통치조직으로 개편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전체 125명의 ‘조선교단’ 총회 대의원 중 75명이 분단 이후 북한 지역에 거주하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통리자 김관식 목사는 1945년 10월 18-19일 양일 서울에서 총회를 소집하였다. 전 대의원의 3분의 1만 참석하였고, 회의 주재자인 김관식 목사는, 특별한 법적 절차도 없이 우선 ‘조선교단’의 이름을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서 ‘조선기독교회’로 바꾸었다. 서정민, “일제 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형성과정” 제16호, 2002. 95쪽.
이들은 자신들의 존재 명분을 한국교회 일치를 위한 추진위원회로 처신할 것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참석자가 41인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자칭 모임 명칭을 ‘41인 위원회’로 정하였다. 서정민, “일제 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형성과정” 제16호, 2002. 96쪽.
그렇게 해서 1945년 11월 27일-30일에 정동제일교회에서 [조선기독교남부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것이 실질적인 제 1차 남부대회다. 이덕주, “남부대회의 조직과 소멸”, 제30권, 2004, 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