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삿 11:1-40
1. 오랫동안 하나님을 신실한 믿음으로 성실로 사랑하며 한 평생 충성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온 날보다 이제 살날이 더 머지않은 그에게 뜻밖의 문제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온 날이 그저 무시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계시는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처한다면 어떠할까요? 여러분은 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실한 믿음을 지키실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이 오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2. 본문의 말씀은 사사기 11장 전체입니다. 사사기의 분량 상 중간에 해당하는 이 부분만큼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의 상황을 잘 드러내 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11장의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10장 후반부의 문맥이 필요합니다. 10장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눈 앞에서 악을 범하여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사사기의 독특한 관점은 하나님께서 주변 가나안 잔류 족속들에게 이스라엘을 파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한 동안 가나안 족속의 핍박과 곤고 앞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오기로 결심합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죄를 범하였사오니 오늘 우리를 구원해주십시오.’
3.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달랐습니다. 10장 11-14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우리는 여기에서 언뜻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째서 그의 백성의 곤고함을 단칼에 거부할 수 있을까요?
4. 우리는 하나님의 이해가 가지 않는 응답에 대해서 흔히들 말합니다. ‘혹 기도가 부족하지는 않은가?’, ‘혹 때가 되지 않았는가?’, ‘혹 우리의 죄가 너무 크기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힘드신건가?’ 우리는 하나님을 착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행위가 부족하지는 않은지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를 더욱 더 멀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행위의 문제에 집중하시기보다는 관계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주변 족속들을 구원하셨음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깁니다. 이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무슨 문맥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란 듯이 깨어 버린 이스라엘의 잘못 때문입니다.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는 하나님께 당연한 듯이 구원을 청구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사고가 나거나 혹은 갑작스런 손해를 입게 되었을 때에 먼저 사과를 하기보다는 돈으로 지불하는 그런 논리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관계에 따라 그 분을 알고, 신뢰하지 못한다면 사사기 10장의 이스라엘의 문제를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대답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5.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말로 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의 곤고를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0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십니다. 그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사사 입다입니다. 그는 11장 1절에 이렇게 묘사되고 있습니다.“큰 용사”( )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 1절에서 또 다른 입다의 내력이 소개됩니다.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라는 내력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사사기 6장 12절에서에서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큰 용사”( )라고 소개한 바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인간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그를 보시는 시점입니다. 그가 아무리 작고 연약하다 할지라도, 그가 어떠한 내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기대하십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를 통해서 일으키실 커다란 하나님의 흐름 속에서 이미 시간을 뛰어넘어 그를 큰 용사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형제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돕 땅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암몬 자손이 군사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치려는 위기가 시작됩니다.
6. 갑작스런 국면 전환에 길르앗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갔듯이 입다에게 다시 나아옵니다. 입다에게 길르앗 장로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삿 11:6) 동일한 한 가지 목적 앞에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두 사람이 섰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힘을 합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길르앗 장로들과 입다의 모습은 조금은 이상합니다.
7. 길르앗 거민을 보죠. 10장에서 길르앗 장로와 백성들은 암몬 자손의 침입이라는 위기 속에 머리를 맞대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 그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삿 10:18) 여러분, 입다에게 말하기 앞서서 처한 위기에 길르앗 거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머리를 맞대고 힘을 짜내봅니다. 그 길고 긴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길르앗 거민들이 마지막으로 우리의 머리가 될 것이라고 말을 해보지만 아무도 목숨을 내 주고 머리의 자리를 얻을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럴 능력도 그럴 담대함도 없었습니다.
결국 입다에게도 온 것은 그러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르앗 거민들은 입다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장관이 되라” 그리고 나서 입다가 거절하자 그제야 다시 말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찾아 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당신이 우리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히브리어로도 NIV로도 분명히 먼저 말한 “장관”과 “머리”는 분명히 다른 단어입니다. 처음부터 입다에게 사실을 고하지 않고 그가 혹 선뜻 응하거든 군대지도자 정도에서 끝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정이 있어 계산에 밝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어떻습니까? 사고가 나면 일 처리를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해서는 길을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 사이에서 미안한 일이 있을 때, 혹은 뜻 밖의 도움을 받게 되었을 때 어떻게 행동하여야 할까요? 오늘날은 계산은 밝을지 몰라도 관계를 잘 알고 어떻게 마음을 다해 교제할 지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8. 입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1장 9절의 입다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입다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길르앗 거민들의 입장이 결코 편하지 만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입다보다 더 이 협상의 자리가 절실했을 것입니다. 입다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시 되묻습니다.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길르앗 방백들은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리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제 협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간에 협상을 인준을 받아야 합니다. 결국 입다는 길르앗 방백들의 말대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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