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불의전차 감상문
1924년 파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영국 출신의 두 육상선수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에릭 리들과 해롤드 아브라함은 같은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사뭇 상반된 신념을 가지고 달린다. 실화라는데 시기를 보면 내용의 주 배경이 되는 24년 파리 올림픽도 그렇고 그 선수들이 살아온 그 시기에 한국은 한참 일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을 때라 묘한 느낌이 들었다. 여러 면에서 참 오래된 영화구나 싶었다. 특히 영화에서 두 선수들이 달릴 때 함께 흐르던 음악은 반젤리스의 Chariots of Fire라는데 노래를 듣자마자 아 요즘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상물이나 극적인 효과로 나오던 음악이 여기서 비롯된 것 이었구나 깨달았다.
때마침 광저우 아시안 올림픽이 한창인지라 색다른 감성으로 볼 수 있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스포츠를 단순히 스포츠로만 볼 수 없는 특별한 신념들. 에릭 리들은 오로지 주님만을 위해서 달리고 애초에 주님을 위한 일이었으니 안식일의 경기를 포기하며 주일은 달리지 않는다고 한다. 에릭의 그 같은 결정을 보며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구태여 이를 필요도 없다. 하지만 달리는 목적 자체가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데 내용이 무엇이든 목적에 반하는 기회라고만 간단히 생각하자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해롤드는 유태인에 대한 멸시와 핍박을 이겨내고 유태인은 열등하다는 세상의 조롱을 깨기 위해 달린다. 영화 속 해롤드의 집념어린 눈빛을 보며 기존 세계사지식을 되짚어보았다. 유태인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고 예로부터 유럽의 핍박을 받아왔다는 것, 특히 독일의 나치정권의 무자비한 학살을 경험했다는 것, 유태인 소녀가 저술한 ‘안네의 일기’ 등 정도일까. 이 기회에 유태인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알고 나니 새삼 두 선수의 이야기의 특별한 점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신실한 기독교인인 에릭 리들, 그리고 자긍심 높은 유태인 해롤드 아브라함 그들은 물과 기름같이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상반된 존재였던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서 달리는 둘의 모습 또한 꽤 대조적이었다. 해롤드는 치열했고 에릭은 거룩한 신념이 주는 희열에 찬 것처럼 보였다. 편을 가르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지만 처음엔 해롤드의 고뇌에 끌렸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해롤드와는 대조적으로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경기를 포기해버린 에릭의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내 교수님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던 ‘예수와 함께한 가장 완벽한 하루’에서의 J의 말이 떠올랐다. 인간 자체로는 완벽한 행복을 추구할 수 없고 아무리 충만한 삶을 살지라도 허기를 느낀다. 고로 그 허기는 주를 통해서만 채울 수 있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영화 속 에릭은 신이 그를 빠르게 만드셨기에 그가 빨리 달리면 신이 기뻐한다는 내용의 대사가 있었다. 이내 그의 순결한 믿음이 부럽고 신념이 너무나 고결해서 잠시간 감탄을 하기도 했다. 요즘 사람들은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먼저 자신을 기쁘게 해주길 바란다. 이 얼마나 가당찮은 착각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오로지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달리는 그와, 태생에서 비롯된 트라우마와 세상의 시선에서 숨지 않고 필사적으로 맞섰던 해롤드 둘 다 육상 스포츠는 하나의 존귀한 수단이었다.
한국 사극 ‘대왕 세종’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절망이라는 건 말이지요, 있는 힘껏 꿈을 위해 뛰었는데 그래서 이제 더는 남은 힘도 없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부서지고 깨지고 무너지기만 할 때, 그 때야 비로소 절망할 자격이 주어지는 겁니다.” 해롤드의 집념 또한 그만큼 열정적이었고 그렇기에 너무나 고결했다. 핍박 받던 민족사 역시 한국의 역사와 오버랩 되어 그가 달릴 때 나 또한 주먹을 쥐고 보게 했다. 한편 에릭의 주님을 위한 믿음과 주를 기쁘게 할 것이란 그 사랑 때문일까 에릭의 동료는 기꺼이 400m 출전권을 내어준다. 그 순간 짧은 구절이 머릿속을 스쳤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믿음을 보여주면 주님은 어떻게든 길을 열어주시는가 종교적인 생각도 수차례 지나갔다. 각자의 신념대로 부딪치는 그들의 모습은 편안함에 안주하고 쉬고 싶고 놀고 싶기만 한 나태한 내 몸을 움직이고 싶게 했다. 나도 있는 힘껏 꿈을 위해 뛰어보고 희열 혹은 절망이란 성과들과 당당히 마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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