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통일정책
2.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이승만은 통일을 공산당에 의해 점령당한 영토를 되찾는다는 ‘실지 회복론’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가 본질적으로 고려한 통일방안은 ‘북진통일’이었다. 이승만은 1949년 2월 미 육군 장관 로얄과의 대화에서 “육군을 무장시켜 빠른 시일 내에 북진하고 싶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유엔이 남한정부를 승인함에 따라 한반도의 모든 영토를 관할하는 것이 합법화되었다고 주장하며, “기다려 봐야 얻을 게 없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미국에 잇는 그의 개인고문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 등에서 “한국은 한 몸뚱이가 양분된 셈”이라며, 분단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전투는 우리가 행할 것”이라며 독자적으로 공산주의에 맞설 것이라는 의지를 표출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9년 6월 공세 이후에 내부를 정리하자 대북공세를 더욱 강화하게 되었고, 38선에서의 충돌은 격화되기 시작했다. 충돌은 1949년 6월 미군철수 후 한국군이 미군을 대체하면서 빈발해졌다. 미군이 철수하면서 남한은 38선에서의 충돌을 격화,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켜 미국으로부터 미군철수에 상응하는 원조를 받아내려 하였다. 공격은 쌍방에 의해 시작되었고, 38선은 이미 전장과 다름없었다. 1949년 가을에 접어들면서 이승만의 북진통일의사가 기자회견을 통해 자주 천명되기 시작했다. 그는 1949년 9월과 10월에 “3일 이내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으나 유엔과 미국이 우매한 일이라고 경고하여 자제하고 있다” “북한공산정권을 제거하고 만주와 압록강·두만강을 국경으로 확보하도록 허용하면 민주주의를 지키는 과업이 한층 용이할 것”, “분단 상태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 “남북한 총선거는 괴뢰정권의 해체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다”고 외쳤다. 이는 북한 뿐 아니라 이는 미국을 향한 신호였다. 남한의 이러한 의지는 정리된 내부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이자, 무엇보다도 중국의 공산화에 따른 아시아 전체의 반공분위기확산과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을 겨냥한 고차원의 포석이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남한 내의 평화통일세력을 억압하고 미국으로부터 보다 많은 원조를 확보하며, 북한과의 대결을 강조하여 국내적인 정치적 안정을 이루려는 의도 등을 포함한 다 목적적이고 다 포석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적인 목표는 역시 북한을 무력으로 공격하여 통일하려는 것이었다. 이승만과 그의 군대 장교들은 이를 위해 38선에서의 무력충돌을 자제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남한 내에서의 게릴라전과 38도선에서의 국경분쟁이 심화되자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이 공격하기 전에 먼저 공격을 가하여 기선을 제압하는 ‘예방전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실천에 옮길 군사력이 부족했으며, 따라서 미국에게 무기원조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하지만 오히려 미군이 이승만의 호전성을 우려하여 원조를 제한하고 공격을 저지시키고자 노력할 정도였다.
38선에서의 충돌은 38선에서의 군사적 긴장뿐만 아니라 남북한정권간의, 그리고 동아시아지역의 긴장도를 한층 더 높여갔다. 38선은 점점 더 첨예한 대립지점으로 상승되었다. 전투는 때때로 대대급간의 전투로까지 확대되었고, 38선을 기준으로 쌍방이 4킬로미터에서 10킬로미터까지 진격해 들어가기도 했다. 규모에 있어서 대대급과 그 침범지역에 있어서 10킬로미터에 달하는 공격과 방어, 이것은 다만 고전적 의미에서의 전면전만 아이었지 사실상의 전쟁상태였다.
참고 문헌
1. 탈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한국전쟁연구회 김계동 외 11인/백산서당
2.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Ⅱ/박명림/나남출판
3. 한국사 17 분단구조의 정착/ 강만길 외 11인/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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