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정 후기의 사회적 상황 / 카이사르의 등장배경
-술라파의 시대 속에서 카이사르 성장하다
카틸리나 역모사건
갈리아 전쟁
사회 정책 개혁
카이사르 사후의 시대 배경
카이사르의 평가
카이사르의 시사점
카이사르는 생전에도 많은 논란을 뿌린 군사・정치 천재였지만 사후에도 그의 이름 자체가 황제를 뜻하는 단어가 되는 인물이다. 그는 포에니 전쟁 이후 혼란기였던 로마를 이끌었으며 제국의 기틀을 확립했다.
그가 남긴 업적 중에서도 손꼽히는 갈리아 정복은 로마와 속주 사이의 모델을 만들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더처럼 정복하고 끝난 것이 아닌, 피정복민들에게 참정권을 주어서 로마권의 확대를 시스템화했다. 이것은 그의 사후에도 로마의 팽창에서 하나의 기본 틀로 자리잡았다.
카이사르는 공화정, 삼두정, 제정으로 변화하는 로마 사회의 흐름을 알고 로마의 발전에 따라 변화를 추진한 인물이다. 카이사르의 독재는 정적을 포용하는 균형감각을 가진 독재였다. 그는 권력 운용에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귀족이나 평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흘러가는 역사에서 반대하는 것을 들어 반동이라고 한다. 브루투스는 로마의 발전에 역행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반동적인 인물이었다.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는 지금까지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대사로 알려진 브루투스가 아니다. 그러나 암살자들은 브루투스가 그들 집단의 지도자가 되면서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암살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사후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인 키케로가 로마의 석학이었지만 선견지명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화정을 지키고자 했던 브루투스의 고결한 정신은 로마인에게 미래를 제시하지 못했다.
카이사르의 사후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대한 대가는 이미 그의 죽음으로 지불되었다. 따라서 그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당당하게 황제로 즉위하면서 황제라는 칭호 대신 프린켑스(제1시민)이란 호칭을 쓰며 구시대의 원로원을 배려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