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새로운 렌즈를 끼다 - 신문화사
Ⅱ. 본론
1. 고려시대의 교육기관
1) 국자감
2) 향교
3) 동서학당
4) 사학 12도
2. 고려시대 교육에 대한 질문들
1) 고려시대에는 어떤 사람들이 교육을 받았나요?
2) 고려시대의 교육기관에서는 어떤 과목을 배웠나요?
3) 고려시대의 성적평가 방법은 어떠했나요?
Ⅲ. 맺음말
Ⅳ. 참고문헌
문종 조에 이르면 국자감이 재정상의 어려움과 최충이 세운 문헌공도文憲公徒 등의 사학이 발달함에 따라 크게 위축된다. 그리하여 숙종 7년에는 관학 폐지론까지 대두되었다. 하지만 숙종은 국학에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하는 등 관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또 뒤이어 왕위에 오른 예종과 인종이 적극적으로 관학진흥책을 씀으로써 국자감이 다시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종 2년 “학교에서 양현을 하는 것은 삼대三代 이후 다스림의 본이 된다.”고 명을 내려 국자감에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도록 했다. 그러나 양현고는 예종 14년에나 설치되었다. 양현고는 국자감 부진의 근본 원인인 교육 재정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고 국자감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예종 4년(1109)에는 국자감에 칠재七齋를 두고 유생을 교육하였다. 7재는 최충의 9재를 모방하여 설치한 것인데, 국자감의 교과목을 7개
의 재齋로 나누어 교수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6재는 유학儒學을 교육하는 재이며, 강예재는 무학武學을 교육하는 재이다. 이처럼 국자감에 문무 양재를 둔 것을 통해 고려 국자감의 독특한 제도를 볼 수 있다.
특히, 7재 가운데 무학재를 포함했다는 점은 당시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문제를 학교 교육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던 예종의 의지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예종 14년 그는 유학재의 학생 정원을 예종 4년에 책정한 70명에서 60여 명으로 감하고, 무학재는 8명에서 17명으로 증원하는 조치를 취했다. 비록 인종 11년(1133)에 이르러 문무 양학兩學 간에 불화가 초래된다는 명분 아래 무학재가 폐지되기는 했지만, 고려 전기 문신 중심의 귀족 사회에서 그 같은 무학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국자감의 쇠퇴 그리고 중흥
1. 박용운, 이정신 외 지음, , 신서원, 2001
2. 박용운, , 일지사, 2009
3. 김영우, 피정만 공저, , 교육과학사, 1995
4. 양호환 외, , 책과함께, 2009
5. E.H.카, , 까치, 2007
6. 곽차섭 편; 최재호 외 공역, , 푸른역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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