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흥-
1. 북곽선생의 ‘흥(興)’
내가 표현기법으로서의 ‘흥(興)’을 처음 본 것은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에서였다. 잠시, ‘흥’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복기해 보자.
때마침 정(鄭)나라의 어느 고을에 벼슬을 좋아하지 않는 척하는 선비 하나가 있으니, 그의 호는 북곽선생(北郭先生)이었다. 나이 마흔에 손수 교정한 글이 1만 권이요, 또 구경(九經) 《역경(易經)》·《서경(書經)》·《시경(詩經)》·《춘추좌전(春秋左傳)》·《예기(禮記)》·《주례(周禮)》·《효경(孝經)》·《논어(論語)》·《맹자(孟子)》
의 뜻을 부연(敷衍)해서 책을 엮은 것이 1만 5천 권이나 되므로, 천자(天子)가 그의 의(義)를 아름답게 여기고, 제후(諸侯)들은 그의 이름을 사모하였다.
본편 우리가 흔히 이라며 인용하는 부분은 ‘호질 이야기’를 짓게/쓰게/얻게 되는 과정을 다룬 프롤로그와 ‘後識’ 사이에 끼어 있는 글이다.
이 되는 부분의 시·공간적 배경과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정(鄭)’은 춘추시대에 풍속이 음란하기로 소문났던 나라이다. 그 나라의, 벼슬을 좋아하지 않는 체하는 북곽선생은 어머어마한 분량의 책을 교열하고 풀어 다시 지었다. 그래서 황제도 칭찬하고 제후들도 그의 덕을 흠모해 마지않는다. 북곽선생은 석덕지유(碩德之儒)인 것이다. 북곽선생을 이처럼 거창하게 소개한 것은, 그가 위학(僞學)과 허학(虛學)으로 자신을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이중적 인간성을 띤 선비임을 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자들이 학자로 행세하고, 명성을 누리고, 권력에 빌붙어 출세하고, 부귀를 누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입으로는 온갖 그럴 듯한 말을, 고상한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뒤로는 추악하고 야비하며 위선적인 행태를 서슴지 않는 사대부들의 자기기만, 즉 당대 사대부들의 위선적인 삶에 대한 야유와 조소의 한 표현이다.
박지원은 외에도 젊은 시절에 쓴 이라든가 제목만 전하는 등 여러 곳에서 위선적인 선비들을 비아냥거리는 분노감을 드러내 왔다. 의 앞부분과 의 끝부분에 나오는 ‘도둑놈’은 의 ‘역학대도’, 즉 학문을 파는 큰 도둑놈과 같은 부류들인데 이곳의 북곽선생도 그들과 동류로 보인다. 신랄한 풍자가 아닐 수 없다.
북곽선생에 대한 소개로만 보자면, 을 온전히 당시 조선의 사회 현실을 풍자한 작품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손수 교열한 책만도 만 권이요, 구경을 해설한 저서는 만오천 권’이나 되는, 위선적인 대학자라는 북곽선생은 조선의 타락한 선비라기보다는 오히려 고증학풍에 매몰되어 만주족 통치의 현실에 안주하는 한족(漢族) 선비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고을 동쪽에는 동리자(東里子)라는 얼굴 예쁜 청춘과부 하나가 살고 있었다. 천자는 그의 절조(節操)를 갸륵히 여기고 제후(諸侯)들은 그의 어짊을 연모하여, 그 고을 사방 몇 리의 땅을 봉하여 ‘동리과부지려(東里寡婦之閭)’라 하였다.
존경받는 북곽선생이나 열녀로 칭송되는 동리자는 당대의 사회가 숭상해 오던 인간상인데, 실속을 파고들어 보니, 북곽선생은 과부의 집을 드나드는 바람둥이이고, 동리자는 성이 다른 아들을 다섯이나 둔 부정한 여인이라는 점에서 조선 사회의 이중성, 허위성이 여지없이 폭로되고 있다.
그러나, 소문난 절부(節婦)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성이 다른 자식을 다섯이나 둔 동리자도 당시 조선 여성의 실태를 반영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김명호, 《열하일기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0, 187쪽. “여자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하며…) 명색이 사족이라 하면, 설사 지독히 가난하고 삼종지도가 다 끊겼다 해도 수절 과부로 평생을 마치는데, 이것이 비천한 노비 하인들까지 퍼져 저절로 국속(國俗)을 이룬 지가 사백 년이나 된다.”는 《열하일기》의 과도 모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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