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의 급격한 사회 변화는 인간의 삶을 빠른 속도로 변화시키고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인간적인 가치보다 중시되는 가치전도 현상을 가져왔다. 이 현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 상실, 가치혼란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며, 이기주의의 팽배로 법질서는 무시되고 선악 판단 기준 또한 애매모호해졌다. 한마디로 도덕적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태도를 잃어버리고 도덕적 자아를 상실하여,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망각하고 사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특징이다. 이러한 도덕적 위기의 원인을 외부 환경의 변화와 다양해진 삶의 조건 등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도덕적인 인간을 길러내기 위한 진정한 노력이 있었는가를 반성적으로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회복하고 혼란해진 가치체계를 재정립하는데 필요한 실마리를 칸트의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리고 어떤 태도를 취하든지 항상 그것에 대해 결정을 해야 하고, 또한 그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 있어 칸트는 그의 도덕법칙에서 악보다는 선을, 자기 이익보다는 의무를 선택해야 함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칸트는 보편타당하고 필연적인 원리로서의 도덕법을 제시하고 있고, 그것은 우리의 모든 도덕적 행위에 대한 규칙으로 작동하고 있다.
칸트의 도덕 구조
1. 선의지
선의지란 옳은 행동을 그것이 옳다는 이유에서 선택하는 의지, 혹은 도덕적으로 칭찬할만한 방식으로 행위과정을 선택하는 자기 의식적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이 세계 안에서 아니 이 세계 밖에서라도, 우리가 제한 없이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선의지만이 조건 없이, 즉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만약 그것을 사용하는 의지가 선하지 않다면 극단적으로 악하고 해로운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선의지를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칸트는 보석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선의지는 그 자체 아름답게 빛나는 보석이고, 여타 유용성이나 무용성은 이 보석의 가치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단지 보석을 넣는 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선의지는 어떤 목적의 달성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다. 선의지의 선함은 어떤 맥락이나 목적, 욕구 등과의 관련에 의해 조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으로 선하다.
칸트는 “오직 이성적 존재자만이 법칙의 표상에 따라 행위 하는 능력, 즉 의지를 갖고 있으며 의지란 이성이 경향성에서 독립하여 선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능력이다.”라고 말했다. 위의 ‘경향성에서 독립하여’라는 표현은 쾌락이나 행복의 원리가 우리의 의지를 규정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됨을 말한다. 선의지는 그 자체로서 높이 평가되고 어떠한 목적도 필요 없으며 우리의 모든 행위의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 언제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다. 선의지는 순수한 의무의식에서 말미암아 행위 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이런 입장에서 칸트는 선의지의 개념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의무의 개념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선의지가 필연적으로 의무에 말미암아 행위 하는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전적으로 선하고 완전한 의지는 결코 의무에서 말미암아 행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의무
오직 의무를 존중하는 동기에서 의무에 맞도록 하는 행위만이 칸트로서는 도덕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행위다. 의무에 배치되는 행위는 아무리 유익하다 하더라도 도덕적일 수 없고, 의무에 부합하는 행동일지라도 그것이 의무에 대한 존중을 동기로 삼지 않을 경우에는 도덕적인 행위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칸트는 행위가 의도하는 목적이나 행위에 의하여 도달되는 결과는 행위의 도덕적 가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여, 오직 의지의 형식적 원리에 규정되었을 경우에만 행위는 도덕적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을 칸트는 “의무는 도덕법에 대한 존경에서 하는 행위의 필연성이다”라는 명제로 표명하고 있다. 법칙에 대한 존경, 그것만이 행위에 내면적 가치를 부여하는 근거가 될 수 있고 따라서 명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칸트 입장에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너의 적까지도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성서의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경향성으로서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명령될 수 없다. 그러나 실천적인 사랑은 의지 안에 존재하되 감각의 벽에 있지 않으며, 행위의 원칙에는 존재하되 감미로운 동정의 원칙에 있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실천적 사랑만이 어떤 상황의 누구에게나 명령될 수 있는 것이다.
특정한 의도, 목적, 욕구의 대상 등은 행위의 도덕적 가치와 전혀 무관하다. 행위의 준칙만이 도덕적 가치를 가진다. 준칙은 다양한 종류로 표현될 수 있으며 객관적인 원칙인 도덕법의 원칙에 따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지의 주관적인 원칙이 실천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보편적인 도덕법칙에 종속된다면 이 준칙에 의해 조정된 행위들은 도덕적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나의 준칙으로 보편적인 법칙의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나의 준칙은 버려야 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법칙의 수립을 직접 존경하도록 이성은 나에게 강요한다. 존경은 경향성의 가치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요, 실천적 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에서 생기는 내 행위의 필연성은 바로 의무인 것이며, 또 의무는 다른 모든 가치를 능가하는 그 자체로서 선한 의지의 조건이기 때문에 다른 어떠한 행위의 동인도 의무에게는 양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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