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
이제부터 이야기할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의 제자로 그의 곁에서 20년을 공부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였지만 플라톤과는 철학적인 입장이 달랐다. 스승인 플라톤이 현실세계와 떨어진 이상세계가 따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세계자체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가 말하는 현실세계란 무엇이고 이상세계와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서 윤리학을 깊이 공부하지 못한 내가 대답을 할 수는 없지만 이제부터 말하려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대해서는 아는 만큼 한번 말해보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면 가장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행복’이다. 맞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하길 원하고 행복해 지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행복’이라는 것이 절대로 정해져 있거나 일률적인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 세상은 너무나 재미없는 세계가 되어 버릴 것이 분명하다. 이 행복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면 남은 것은 바로 행복이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이 꿈꾸던 이상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상세계에 대해 듣고 배우면서 매우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플라톤이 꿈꾸던 세계는 너무나 평화로워서 지겹게 느껴질 것 같은 나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그것이 실현 불가능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혼의 순수함과 선을 추구했던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실현불가능한 선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좋은 것인가? 라는 물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각자가 추구하는 욕구가 바로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선이나 좋은 것에 대해 말하든지 만약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그리고 동의할 수도 없으면 그것은 쓸모없고 소외된 가치에 불과하며 우리의 삶을 억압해 들어오는 타율적 강제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최악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였을 것이다. 각자가 바라는 행복과 좋은 것을 무시하고 독재자가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획일화 시킨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용서받지 못할 자’인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생각과 행동을 한다. 우리가 하는 행동들은 매순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지향하게 되어있다. 간혹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 큰 보상을 위해서이거나 손해를 덜 보기 위한 행동일 것이다. 만약 이런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람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을 향해 점점 다가갈 때에 사람은 행복을 느끼고 보람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목적만을 향해 나아간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궁극적인 목적’을 말한다. 모든 행위에 있어서 사람은 단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단기적인 목적들은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것들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마치 그림을 그릴 때에 구상과 스케치를 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면 비율이 어긋나거나 처음 의도와 어긋나듯이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우리의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하고 물었고 우리의 삶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것들 가운데 최고로 좋은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행복’이라고 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행해지길 원하지 않으므로 행복은 보편적으로 추구되는 가치이다. 또한 행복은 그것 자체가 아닌 다른 것을 위해 수단적으로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마치 무엇을 위해 행복하게 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이 성립할 수 없듯이 행복은 그 자체로 추구되는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을 당연한 것으로 보지 않고 원칙적인 자연적 욕구라고 생각했다. 각자가 자신의 행위에서 원하고 바라는 것 그 자체가 좋은 것이며 그것이 선이라고 했다. 또한 최고의 선은 당위적으로 요구되는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추구하고 욕구하는 대상인 행복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윤리적 이상이 인간의 자연적 욕망에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이념적 가치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모든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현실세계일 뿐이며 이상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행복이란 상대적인 것이고, 동물처럼 아무 걱정 없이 먹고 잘 수 있는 것이 행복일까? 이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은 그 자신에 고유한 일과 기능을 완전히 수행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플라톤이 말한 일의 개념과 같다. 우리가 자신에게 고유한 일, 자기에게 어울리는 일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상태가 바로 행복이며 그때 느끼는 내면의 희열과 기쁨이야말로 참된 행복에 수반되는 참된 기쁨이자 쾌락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행복이란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고유한 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즉, 할 건 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나조차도 행복해 질 수 있는 법을 공부하듯 인간은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을 원한다고 해서 똑같이 행복에 도달할 수는 없다. 제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선택한 일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우리의 삶은 언제나 좋은 것이 자동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고 나쁜 것을 선택할 때에 우리에게서 볼 수 있는 지속적인 경향성을 가리켜 성품(성격)이라고 불렀다. 이 성품의 탁월함이 윤리적 덕이다. 항상 좋은 것을 선택하는 성품을 가진다면 윤리적으로 덕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여기서 좋은 것이란 나에게도 좋지만 보편적으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것을 말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쁜 길로 빠지는 원인은 정념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정념이란 “욕망·분노·공포·태연·질투·환희·사랑·증오·동경·경쟁심·연민 그리고 일반적으로 쾌락이나 고통을 수반하는 감정”들이다. 우리가 어떤 성품을 갖는가 하는 것은 정념을 얼마나,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정념은 무조건 억압하고 누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정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정념을 자연적인 것으로 봤으며 도덕적 판단물이 아니라고 했다. 문제는 정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념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다스리는가이다. 정념은 그 자체로 선이나 악이 아닌 것이다. 다만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중용의 상태)를 가장 안정적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러나 이 중용의 상태는 인간마다 틀리며 스스로 중용의 길을 걷고 있는가라는 판단도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으로 성숙한 인격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이 선하고 악인지 판단할 수 있는 도덕적 판단력을 길러야 하는데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로네시스(실천적 지혜)라고 했다. 그리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선한 마음씨만 갖는 것으로 부족하며 그것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천적 지혜는 추상적으로 그것을 암기 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 것이며, 일반적인 법칙을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시키는 훈련을 통해서 정차 나야져야 한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올바른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서 삶을 되묻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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