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 첫머리를 ‘모든 기술과 탐구, 모든 행동과 추구는 어떤 선(善 good)을 목적으로 한다’ 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 명제에는 적어도 두 가지 정도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으니 그 하나는 목적론적 관념이고 다른 하나는 선의 관념이다. 즉, 인간 존재와 그 활동은 어떤 목적을 지향하게 되어 있는 바, 그 목적은 인간에게 좋고 옳은 것으로서의 선을 실현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관점은 그가 『형이상학』에서 실체의 생성 및 발전을 형상인, 질료인, 운동인, 목적인이라는 원리에 의거하여 설명한 바와 맥을 같이 한다. 즉, 모든 개체적 실체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체이며 항상 어떤 목적을 향해 움직여 나가는 바, 우주만물의 본질과 운행에 대한 이러한 원리는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그 존재 의의와 제 활동이 모두 어떤 목적으로서의 선의 실현을 추구하는 것으로 파악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동하면서 추구하는 것 가운데에는 어떤 하나의 목표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그 자체로 원하며, 다른 것을 바라는 것은 그것 때문이고, 우리가 선택하는 모든 것이 어떤 다른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여러 가지 선들 가운데 유일한 최고의 선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철저하게 목적론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만큼 그의 윤리학이 목적론적 윤리학이라고 불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추구하여야 할 최고의 궁극적인 목적을 어떤 초월적이거나 신비한 것 내지는 특별한 사람들이나 얻을 수 있는 그러한 것에서 찾고자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통상적으로 추구할 만한 것에서 구하고자 하였으니 그리하여 제시된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으로서의 최고선은 바로 행복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행복이야말로 모든 행동의 목표이며 최종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그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해서 행복해질 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그는 사람이 덕을 지닌 도덕적 존재가 됨으로써, 즉 유덕한 인격인이 됨으로써 가능해진다고 답한다. 악기 연주가, 조각가 등의 예술가나 목수, 피혁공 등의 경우를 볼 때 그들이 최고의 선을 산출하려면 각각의 기능이 최고도로 발휘될 때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최고선으로 삼는 행복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기능이나 활동이 최고로 실현될 때 얻게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겠다. 그러면 인간에게 고유한 기능과 활동은 어떤 성격의 것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여타의 생물과 인간을 비교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하여 단순히 영양을 섭취하고 그럼으로써 성장을 도모하는 것은 식물도 그러하니 인간에 고유한 것이 될 수 없고, 반면에 인간의 정신 활동 중 감각 욕구적인 것은 동물도 가지고 있는 것이니 이 또한 인간에 고유한 것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정신 활동 중에서 이성적인 것만 남는 바,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고유한 기능과 활동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다른 한편으로 자아실현의 윤리학이라고도 불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누구나 그 고유의 기능과 능력, 잠재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바 이를 최고로 발현시킬 때 자아실현을 이루게 되며 이렇게 자아실현을 성취할 때 행복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렇듯 인간이 그 고유한 기능과 능력 그리고 잠재 가능성을 실현하고 그럼으로써 자기완성을 통해 행복에 이르는 일에 덕이 필수적으로 관련된다는 점이다. 원래 덕이란 그리스어의 아레테에서 온 말로서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가 그 기능과 목적 면에서 탁월성을 지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자기실현과 자기완성을 도모하고 행복해지려면 그러한 목적을 추구하는 데 가장 잘 봉사하고 자신의 기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해주는 덕들을 발달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 실현에 덕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인간 삶의 목적은 행복의 실현에 있으며 이는 덕들을 발달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다음, 도덕적 덕의 문제가 인간 정신의 여러 부분 중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감정, 정서, 욕구, 의지 부분과 관련되며 따라서 이를 고려한 도덕교육이 요청됨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의 도덕 생활은 우선 감정과 정서, 느낌, 욕구 등과 같은 것들을 적절히 다스리고 알맞게 발동하게 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 정서, 욕구 등이 발동함에 있어 그것이 과도하거나 부족할 때 악이 되고, 적절하게 이루어질 때 선이 된다고 보았다. 또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다스리는 일과 관련하여 중용을 지향하는 선택과 행위 능력 및 성품의 육성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선을 지향하는 감정, 의지 등은 궁극적으로는 과부족이 없는 중용으로 귀결될 때 온전하게 실현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도덕적 덕은 중용을 잘 실천하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때 중용은 적당주의나 기회주의 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중용이 아니라 중용을 가장한 또 다른 과도이거나 아니면 부족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중용은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하여, 마땅한 사람들에게,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방법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중용은 어중간하거나 애매함이 아니라 주어진 주건 하에서의 ‘최선’ 내지 ‘가장 적절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덕이 행동과 관련이 있다 함은 도덕적 덕이 옳은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그 한 측면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옳고 좋은 일을 행동과 실천으로 구현하지 않는 한 그에게 덕은 없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볼 때 도덕적 덕은 선에 관해 바로 알고 그것을 좋아하고 의욕적하면서 동시에 이를 생활 속에서 비교적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내포한다고 하겠다. 이를 굳이 요즘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도덕적 덕은 인지적정의적행동적 측면의 세 가지로 구성되고, 그 형성과 발달도 이와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된다.
마지막으로, 도덕적 덕을 형성하려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성품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 덕은 선택의 양식이거나 선택을 내포하는 것 또는 중용을 선택하는 성격의 상태임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중용 선택의 도덕적 덕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실천적 지혜와 이성적 원리에 의거하여 행위를 결정하는 그러한 성품이 길러지지 않으면 안 됨을 강조하고 있다.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끌린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철학이 목적론적이었기 때문이다. 표면에서 보이는 현상만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것을 탐구하고자 했던 그의 혜안에 많은 공감이 갔던 것이다. 삶의 목적은 행복이고 그 행복은 덕을 실현할 때 성취할 수 있으며 덕을 실현하려면 중용이 필요하고 중용의 자세를 가지려면 올바른 판단을 할 줄 알아야 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의 논리에 다시 한 번 감동하게 된다. 그의 이론이 논리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지만 가장 아쉬운 점은 그가 사용한 단어의 개념들이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행복이나 덕, 중용 같은 개념들은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 특히 덕이나 중용 같은 개념은 그러한데 ‘덕’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흔히 온화한 성품 같은 것을 떠올리지만 저자가 말한 ‘덕’은 어떤 개체가 그 개체의 기능을 다 하여 그 개체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말하고, 중용 같은 것도 우리는 흔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 중용이라는 것은 모든 것에 있어서의 적절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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