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1. 인간적 행위의 구조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은 그런 행위를 하게 한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다. 병원에 가는 사람의 행위 하나를 놓고 보아도 아프지 않으면서 병원을 단지 구경할 목적으로 가는 것인지 아니면 아파서 치료받을 목적으로 가는 것인지가 그 행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차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 방식으로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는 사람에게 행위는 주로 그것이 지향하는 목적을 통해 이해되고 설명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인간적 행위의 이러한 목적 지향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하나의 행위를 설명하는 목적에 대해 다시 그 목적을 정당화하는 상위의 목표를 물을 수 있다. 병원에 가는 행위를 ‘질병의 치료’라는 목적을 가지고 설명했다면 다시 ‘질병의 치료’는 ‘건강의 회복’이라는 보다 상위의 목적을 가지고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 목적을 가지고 행위를 설명할 경우 행위 자체는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되는데, 예를 들어 병원을 가는 행위는 ‘질병의 치료’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인간 행위를 수단과 목적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행위의 목적은 동시에 다른 보다 상위의 목적을 위한 수단일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하는 고등학생의 행위는 ‘수능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설명될 수도 있지만 수능시험에서의 좋은 성적이라는 목적은 다시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한’ 목적에 대해서는 수단이라는 말이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가는 것 자체는 다시 다른 것, 예를 들어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수단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의 목적을 다시 묻고, 대답으로 주어진 것에 대해 다시 그 목적을 묻는다면 어떻게 될까? 보다 상위의 목적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무한히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어느 순간 더 이상의 목적을 얘기할 수 없는 곳에 이를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무한히 간다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일, 우리의 욕구 자체가 공허하고 쓸 데 없는 것이 된다고 하면서 어디선가는 더 이상 상위의 목적을 얘기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고 말한다. 앞에서 들었던 예를 계속 쓰자면, 안정된 직장을 얻는 것은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거나 ‘인간다운 삶’ 혹은 ‘보람있는 삶’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며 무엇 때문에 혹은 무슨 목적으로 ‘인간다운 삶’이나 ‘보람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상위의 목적을 얘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다운 삶’이나 ‘보람있는 삶’은 더 이상 다른 것의 수단이지 않으면서 오직 목적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목적을 ‘궁극목적’이라 부른다.
2. 행복의 윤리학
이러한 설명방식에 따르면 지금 열심히 공부하는 고등학생의 행위는 ‘인간다운 삶’이나 ‘보람있는 삶’을 궁극목적으로 설명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궁극목적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가와 관련해서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같은 대답을 듣는다고 한다. 궁극목적의 이름은 행복(eudaimonia)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는 것이다. 문제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가, 즉 행복의 구체적 내용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당대의 통념은 부(富)나 명예, 쾌락과 같은 것을 행복의 내용으로 놓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분석을 통해 이러한 것들은 진정한 행복의 내용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부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만 유용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궁극목적이 될 수 없다. 또 행복은 우리에게 고유한 것이며 쉽게 박탈될 수 없어야 하는데, 명예의 경우 명예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더 결정적이기에 명예 또한 행복의 내용을 이루지 못한다. 쾌락을 극대화 하는 삶은 짐승들에 알맞은 삶이며 욕망의 노예가 될 뿐인 삶이라는 이유로 역시 거부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기존의 통념과 철학적 논변을 검토하면서 행복의 토대가 되는 의미를 확보한 후 인간의 고유한 기능(ergon)을 통해 행복을 정의한다.
3. 기능논변에 따른 행복의 정의
우리는 어떤 외과의사를 보고 훌륭한 외과의사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외모가 멋있어서 혹은 그가 여가시간에 운동을 잘 해서 훌륭한 외과의사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가 외과수술을 잘 해서이다. 혹은 어떤 목수를 보고 좋은 목수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들고 다니는 연장가방이 멋있기 때문이라거나 보통사람보다 밥을 많이 먹어서가 아니라 목수로서의 일을 잘 해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수행해야 할 기능 혹은 해야 할 행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잘’ 한다거나 그 분야에서 ‘좋은’ 혹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얘기할 경우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그 기능 내지 해야 할 행위이다. 외과의사로서의 기능 혹은 목수로서의 기능을 잘 수행해 내는 사람이 ‘훌륭한 외과의사’이거나 ‘좋은 목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목수나 외과의사가 갖는 특수한 기능과 행위를 넘어 인간으로서 갖는 기능을 물음으로써 ‘훌륭한 인간’ 혹은 ‘좋은 인간’을 얘기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한다. “눈이나 손이나 발이 그리고 일반적으로 신체의 부분들의 하나 하나가 분명히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듯이, 우리는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이 모든 것들 이외에 어떤 무언가의 기능을 상정해야 하지 않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전체로서의 인간이 갖는 기능을 삶에서 찾기 시작하지만 식물이나 동물과 공유하는 삶의 기능, 즉 성장이나 감각 내지 감각에 수반되는 욕구는 배제한다. 인간의 기능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 혹은 인간만이 잘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성장이나 감각 등은 식물, 동물의 삶과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탐구를 거쳐 남게 되는 것은 결국 영혼의 이성적 부분에 의해서 규정되는 삶이다. 인간의 고유한 기능은 이성 능력을 현실화하는 삶이다. 좋은 혹은 훌륭한 하프 연주자가 하프를 잘 연주하는 사람이듯이 훌륭한 인간도 인간의 고유한 기능인 이성적 삶을 잘 살아 내는 사람이다. 만약 인간 고유의 기능 중의 하나가 마땅히 분노를 느껴야 할 때 마땅한 정도로 분노를 느끼는 것이라면, 또 다른 사람과의 거래에서 마땅한 것 이상으로 너무 많은 이득이나 너무 적은 이득을 취하지 않는 것이라면, 인간에게 열려있는 그 모든 행위와 태도의 가능성에서 가장 좋은 행위와 태도를 취하는 것이 인간 기능의 탁월한 발휘일 것이다. 용감할 수도 있고 비겁하거나 무모할 수도 있는 순간에 용감하게 행위하는 것, 탐욕스럽거나 매번 다른 사람의 탐욕의 희생양이 되어 너무 적게 받을 수도 있지만 정의롭게 처신하는 것이 인간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이지만, 발휘의 기회가 오면 언제나 잘 처신할 수 있는 품성상태에 따라 그렇게 처신하고 행위하는 것이 인간의 기능을 최고로 발휘하는 것이다. 다음 절에서 설명하겠지만, 주어진 기능 발휘의 기회가 오면 언제나 잘 발휘할 수 있는 영혼의 품성상태가 곧 덕(arete)이므로 덕은 자신 속에 ‘잘함’ 혹은 탁월성의 계기를 함축한다. 인간 고유의 기능을 어쩌다 한번 탁월하게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탁월하게 발휘할 품성상태에 따라 발휘하는 것, 그것이 바로 덕에 따른 활동이다. 행복은 인간 영혼의 덕에 따른 활동이다. 즉 인간 고유의 기능을 발휘하되, 발휘의 기회가 오면 언제든지 잘 발휘할 수 있을 품성상태에 따라 발휘하는 활동이다.
4. 덕의 윤리학
궁극목적으로서의 행복이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으로 정의되면, 행복을 이해하기 우해 필요한 다음 단계의 과제는 당연히 ‘덕’이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이성적 삶이라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 어떤 방식으로 수행되는 상태가 ‘덕’에 따른 활동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크게 이성적 부분과 비이성적 부분으로 나누되 비이성적 부분 중 일부는 이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성의 얘기를 듣고 따를 수는 있다고 한다. 이 비이성적 부분이 어떤 방식으로 이성에 의하여 설득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훈계를 하고 꾸짖고 권고를 하는 관행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의 영혼이 보여주는 기능은 인간에게 ‘품성’ 혹은 ‘성격’으로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절제있는 혹은 온화한 품성 혹은 성격을 가질 수도 있고 무절제한 품성 혹은 화를 잘 내는 성격을 가질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영혼의 부분이 담당하는 기능을 잘 발휘하는 품성상태, 혹은 성격이 바로 품성의 덕이다. 어떤 사람이 ‘절제’라는 품성의 덕을 가졌다는 말은 그러니까 자신의 육체적 쾌락에 대한 욕구가 지나치게 풀어놓거나 지나치게 억누르지 않는 적절한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으며 바로 이런 방식에서 인간 고유의 기능을 잘 발휘하는 성격을 가졌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용기’라는 품성의 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관련해서 지나치게 겁을 먹거나 지나치게 무모하지 않은 적절한 상태에서 행위할 수 있다는 말이며 이런 방식으로 인간이 갖는 고유한 가능성을, 언제든 발휘의 기회가 오면 잘 발휘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관점에서 품성의 덕이 지나침과 모자람이라는 두 악덕들 사이의 중용이라고 정의한다.
구체적인 경우에 있어서 어떤 것이 너무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실천적 지혜(phronesis)이며 이것이 처음에 지적했던 영혼의 이성적 부분에 속하는 덕이다. 실천적 지혜라는 사유의 덕이 주로 행위와 관련해서 중용을 결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면, 기술 혹은 기예(techne)라는 사유의 덕은 제작과 관련해서 인간의 고유한 이성적 기능을 잘 발휘하는 이성의 상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철학적 지혜(sophia)라는 사유의 덕은 수학적 대상이나 형이상학의 대상과 같이 그 원리가 다르게 있을 수 없는 대상들에 대한 관조와 명상이라는 순수이성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중심개념인 행복을 구체화하는 것이 덕이므로 이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덕들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1) 품성적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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