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 3에 관한 보고서
제주도민으로써 가장 가슴 아픈 달이 돌아왔다. ‘제주 4.3사건’이 있었던 4월 달이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 스스로 4.3사건에 대해서 잘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 때 까지 많이 찾아갔었던 4.3 평화공원을 그 날의 아픔을 되새겨 보고자 친구와 다시 한 번 찾아가기로 했다.
4.3 평화공원에 들어가자마자 4.3백비가 보였다. 백비란,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데, ‘봉기, 항쟁, 폭동,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왔던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하루 빨리 제대로 된 이름이 붙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주 4.3을 대략적으로 보여주는 곳에 들어갔는데, 그 곳에서 양은하 어머니라는 분이 한 말이 굉장히 마음에 아팠다. “둘째 아들도, 며느리도, 큰 아들도 모두 내 눈 앞에서 잡혀갔어. 모두 걱정 말라면서 떠나갔는데 아무도 안 돌아와. 아직도 가슴이 가득해오면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와. 너무나 억울해서 나는 몇 백 년이고 아들을 다시 보기 전에 죽을 수가 없어. 절대로 죽을 수가 없어...”라는 말에서 그 당시의 비참함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양은하라는 아들 분은 경찰의 고문으로 숨졌다고 나와 있었는데, 돌아오▲양은하 어머니 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들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할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왔다.
그 곳에서 내가 가장 슬펐던 것은 “귀순하면 살려주겠다.”는 말이었다. 그 당시에는 산으로 숨거나,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전부 ‘빨갱이’라는 명목 하에 다 총살로 죽여 버렸었다고 한다. 귀순하면 살려주겠다는 이 말은 “산에서 내려온다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즉, 사면계획이었는데, 산에서 내려와도 과거처럼 무조건 죽이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피난민들이 나뭇가지에 흰 옷을 매어 만든 백기를 앞에 들고 산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1만 명에 이르는 하산민들은 대부분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는데, 말과는 다르게 산에서 내려온 주민들 중 일부 노약자들은 곧 풀려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수용소에 수개월 동안 감금된 채 철저히 심문을 받았고 그 가운데 오랜 피난 생활의 후유증으로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순진한 사람들의 믿음의 결과가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사전적 의미로 ‘귀순’이란 적이 반항심을 버리고 스스로 복종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사면’이란 죄를 용서하여 형벌을 면제한다는 뜻인데 이 모두는 ‘적’과 ‘죄’를 전제로 한 말이다. 무고한 도민들이 학살을 피해서 산에 간 것이 ‘죄’가 될 수 없고 피난민들은 ‘적’이 아니기에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같이 간 친구가 ‘다랑쉬굴 사건’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어서 물어 봤다가 굉장치 충격적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랑쉬굴 사건’이란 다랑쉬 마을 근처에서 군인들이 피난민과 그들의 은신처인 작은 굴을 발견한 것에서 비롯된 사건인데, 군인들은 굴 밖에 있던 사람들을 총살한 후 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말한다. 굴의 속으로 수류탄을 던져도 사람들이 나오지 ▲다랑쉬굴 사건을 재현한 모습 않자 밖에서 불을 피워 질식사시켰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이 사건의 실체가 알려진 뒤 유족과 도민의 여론은 “양지바른 곳에 안장시키자.”라는 것이었는데 얼마 후 이런 여론들은 싹 다 무시되고 화장시키자는 것으로 결정지어 졌고, 유해는 불에 태워져 바다에 뿌려졌으며 다랑쉬 굴을 폐쇄되었다는 것이었다. 정부의 은폐력이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그렇게 묻어버리고 그들에게 유리한 것만 보여주려고 하다니... 국민들에게 혼동을 주지 않기 위해서, 또는 국민들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은폐한다고 그들은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내가 볼 때는 그들에게 분리하게 적용될 수 있으니 은폐하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덮는다고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다랑쉬 굴에서 살았었던 모습을 재현한 동굴을 들어가 봤었는데 식기나 도구 같은 일상용품들과 함께 여러 구의 시체들이 많아서 마음이 아팠다.
밖에 있는 전시회도 구경했는데, 4.3과 관련한 여러 가지 시가 있어서 살펴봤다. 그들의 감정이 잘 드러나 있는 시도 있었고, 할머니 분들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시는 ‘돌림노래만 만들지 말아주게나’라는 시였다. ‘4월의 향기를 내뿜고 있는 저 꽃에게, 슬픈 피비릿내로 또 다시 코를 괴롭힐 것인가?’라는 구절이 4.3의 아픔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읽는 내내 눈시울이 붉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들도 굉장히 다양했는데, 어둡고 검붉은 색감으로 노인 분들을 그린 것이 굉장히 와닿았다.
집에 와서 4.3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서 4.3 진상 보고서를 찾아봤다. 나는 미처 찾아가 보지 못했지만 4월 3일날 이루어졌던 위령제에 갔던 아이들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위령제에 찾아왔다고 말을 해주어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4.3사건에 대해 무관심하게 행동하지 않고, 관심을 가져주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진상 보고서를 찾아보니 그것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주도에서 발생한 제주 4.3사건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 발생 50▲4.3전시회 년이 지나도록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아 민원이 그치지 않다가 2000년도에 비로소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비로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이뤄졌다고 한다. 바로 진상 조사가 이루어져도 모자랄 판에 미루고 미룬 끝에서야 진상조사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우리나라 답다고 생각했다. 그 때까지 답답하게 기다려야만 했을 유족들을 떠올려보니 나까지도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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