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 당신은 어느 쪽 입니까(누가복음 17장11-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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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설교문 - 당신은 어느 쪽 입니까(누가복음 17장11-19절)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눅 17:11-19)
제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 ‘소현’이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이제 중학교 2학년인 아주 예쁘고 귀여운 여자 아이입니다. 중학교에 갓 입학해서 우리 교회에 머리를 질끈 묶고 나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처음에는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가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시간이 흐를수록 그 믿음이 더욱 커 가는 겁니다. 이제는 누가 봐도 어엿한 믿음의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름 수련회가 끝난 며칠 후 였습니다. 이 아이가 주일 예배 시간에 신디 반주를 하는 날이었는데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인가 걱정했는데 예배가 끝난 후 갑자기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와서 안겨 우는 겁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소현아, 왜 그러니?” 너무나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무슨 말은 한 지 아십니까? 저는 그 아이의 대답을 듣고 가슴에서 뜨거운 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전도사님, 저 너무 속상해요. 제가 예배 시간에 정말 온전히 주님께 예배드리지 못한 것 같고 반주 연습도 많이 못했어요. 이런 제가 무슨 자격으로 이 자리에 앉아서 찬양을 할 수 있겠어요. 주님께 너무 죄송하고 속상해요!” 이러면서 그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립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지지만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고 대견합니다. 저도 그랬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얼마나 좋으셨겠습니까?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하셨겠습니까? 이 뿐만이 아닙니다. 어린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위해 목숨 걸 정도로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기랑 안 놀아주면 이슬람교 가겠다, 힌두교 가겠다고 협박하던 아이들도 변화되니까 예배의 자리에 나옵니다. 이제는 중등부에서 빠져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습니다. 불신자 부모님이 교회 가지 말라고 호통 치는데도 예수님 믿어야 천국에 간다고 울면서 전도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학원이나 집안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배를 빠져야 하는 아이들은 가슴으로 울면서 오후 예배라도 참석하겠다고 그 먼 거리에서 뛰어옵니다. 이 아이들은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금도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기도하고 예배의 자리에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너무나 자랑스럽고 예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믿음의 선봉장, 믿음의 유산을 물려줘야 할 최전선에 있는 우리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서 큰 힘을 가지고 있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운영해 나가는 우리 어른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바울의 말처럼 믿음의 경주를 위해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아직 어린 아이들이 저 정도라면 우리들은 당연히 그 이상이겠지요.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도 아이들처럼 예배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까? 예배에 자신을 산 제물로 온전히 드리지 못했다고 울면서 통곡하고 있습니까? 누가 방해하고 말려도, 예수쟁이라고 욕하고 핍박해도 예수님 믿어야 천국 간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지금 여기 앉아 있는 한 순간 순간이 자신에게 있어서 최고의 순간이고 가장 기쁜 시간입니까? 안타깝게도,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 기록란에 ‘기독교’라고 쓰지만 실제로 기독교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미국은 대통령이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취임식을 하는 기독교 국가입니다. 우리에게 신앙을 전해주기 위해 수많은 선교사님들을 파송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가슴 아픈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나라가 점점 예수님과의 첫사랑을 잃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2007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스스로 거듭난 신자라고 밝힌 사람들은 전체 기독교 인구 중 38퍼센트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교리적으로 거듭남의 기준에 맞는, 곧 진실로 거듭났다고 말하는 사람은 8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2005년에는 7퍼센트였고 다음 해에는 9퍼센트였습니다. 2006년에는 45퍼센트가 거듭난 신자라고 주장했으나 그 가운데 21퍼센트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가슴을 치고 땅을 치며 통곡할 일이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선포하던 강단에 더러운 향이 피어오르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뜨겁게 헌신했던 위대한 믿음의 선조들의 이름이 하나씩 잊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성령의 역사로 1907년 평양 대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죽을 힘 다해, 교회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머리카락이라도 잘라서 팔았던 그 신앙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까? 예배를 위해 천리 길도 마다않고 달려와 하나님 만나고 가는 일이 지금도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의 특별한 통계를 구지 제시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진실로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 그에 걸 맞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습니다. 이전의 그 감격, 성령의 역사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누구도 위대한 부흥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천리 길은커녕 집 앞 교회에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일이 있으면 일을 핑계로 예배 빠지기가 일쑤고 피곤하고 지치면 한 주쯤 쉬면 어떠냐고 자리에 누워버립니다. 예배는 무조건 일주일에 딱 한번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 순서가 끝나면 아무도 모르게 급히 자리를 빠져나갑니다. 자녀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예배에 아예 보내지 않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학원 책상이 들어왔습니다. 당연합니다. 예배는, 그리고 신앙생활은 세상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문화에 뒤쳐지지 않게 하기 위해 또는 대인관계를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만 교회에 내보내기도 합니다. 지독합니다. 너무나 지독한 현실입니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은 교회에서 소외 계층입니다. 아직 무엇을 판단하기에는 이르고 어린 나이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돈을 벌어 어떤 일을 계획할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자주 무시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흥이 되어 아이들이 많아졌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많은 것은 좋으나 귀찮아지거나 돈을 더 많이 지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조금 떠들면 어른들에게 혼이 납니다. 힘들어서 울고 불며 기도하는데 시끄럽게 한다고 핀잔 받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계획해서 말하면 너희들이 무엇을 아냐고 혼이 나기도 합니다. 우리 어른들의 기준에 못 미치거나 너무나 튀면 눈 밖에 나기도합니다. 그들은 어쩌면 신앙생활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오히려 그들 가운데 진짜 순수한 믿음의 사람이 나오고, 그들 가운데 진짜 예배에 목숨을 거는 참 제자들이 나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들의 그 믿음은 우리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크고 위대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믿는 예수님을 동일하게 고백하지만 진실로 마음 가운데 철저하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기득권과 신앙은 비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그러나 그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철저하게 계산되고 철저하게 이기주의적인 교만한 신앙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순수합니다. 순수하게 예수님을 고백하고 사랑합니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드릴 수 있는 순수한 아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6절을 보면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지금의 우리의 현실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역시 이와 같은 사건이 등장합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심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길에 사마리아를 우회해서 가지 않으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받거나 교제를 하기에 부당한 사람들로 취급받았습니다. 사마리아에 들어가서 그들을 만나는 것은 유대교 율법 상 예수님을 부정한 자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데 그 길을 걷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건이 펼쳐집니다. 우리는 여기서 극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문둥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문둥병자와 조금이라도 접촉하는 사람은 모두 부정하게 되어있습니다.(레13:42-46) 상종하지도 않는 민족인 사마리아인. 그것도 모자라서 문둥병자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 자리에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목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선생님이시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13절) 어땠을까요? 얼마나 처절한 외침이었겠습니까?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자신들의 참상을 보고 그들은 고침을 받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처음에 복음을 전해 듣고 열심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첫사랑을 기억하십니까? 그 때 얼마나 간절하고 급하셨습니까? 또 그 때 얼마나 감격하고 기뻐하셨습니까? 우리에게도 처음에는 갈급함이 있었고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기쁨이 있었고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너무나 갈급했고 목말랐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외쳤던 겁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치유를 위해 거창한 문구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문에는 어떠한 극적인 사건이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간단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그들에게 순종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에 합당한 행동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땠습니다. 순종했습니다. 그대로 자신들을 제사장에게 보이기 위해 제사장에게 향했습니다. 제사장에게 간다는 것이 함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