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문] 영화 넛츠 감상문
‘Nuts’는 우리말로 ‘미친, 제정신이 아닌’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다. 영화 의 주인공 클로디아는 고급 콜걸로, 자신을 폭행하려는 남자 고객을 살인하여 기소된다. 그러나 명망가인 그녀의 부모는 딸을 정신병자로 만들어, 재판 자체를 받지 못하게 하려 한다. 재판으로 여론이 떠들썩해지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위신에 흠이 가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우리 딸은 약하다’, ‘그 애는 법정이 아니라 병원에 있어야 한다’며 변호사 레빈스키와 의사를 설득한다. 하지만 실제로 클로디아를 만난 레빈스키는 다른 인상을 받는다. 그녀가 정말로 미친 것인가? 정말로 재판을 받을 수 없을 만큼 쇠약한가? 의사에게 물어봐도 그는 대답해주지 않는다. 반면 클로디아는 부모를 증오하며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
클로디아는 레빈스키를 만났을 때, 자신이 치마를 들추며 어필했는데도 넘어오지 않는 ‘이상한’ 남자들이 있다며 “당신도 이상한 사람인가요?”라고 묻는다. 그리고 성(性)을 팜으로써 ‘남자들을 행복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미 그 세계의 법에 익숙해져있었고, 또한 이것을 이용할 줄 아는 여자였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녀가 판사와 부모들 앞에서 흥분하여 열변을 토하는 장면에서는 어떠한가? 구강성교를 요구하며 수백 달러를 바치고, 편안한 집과 호화로운 휴가를 위해 증오하는 남자와 결혼하며 딸을 팔아버리는 사람들이 정말 ‘nuts’가 아니냐고 묻는다. 그녀가 가출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그리고 콜걸로 살아온 세계에는 수많은 ‘nuts’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지금 자신을 ‘nuts’로 만드는 그들이 바로 ‘nuts’라고 울부짖는 것이다. 영화에서 클로디아는 결국 정신병을 갖고 있지 않음을 인정받고 재판을 받고, 정당방위에 대한 주장 역시 받아들여져 결국 자유의 몸이 된다.
영화를 감상한 뒤 개인적으로는, ‘당신들은 종이로 나를 미친 여자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을 위해 미칠 수는 없다’는 클로디아의 대사가 기억에 남았다. 초반에서 남자들을 유혹하고, 이들을 이용하려하는 자신감 넘치던 모습과는 달리, 절정으로 갈수록 감춰져있던 그녀의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듯 했다. 어렸을 적 이혼하였으나 편안한 생활을 위해 재혼한 어머니, 의붓아버지의 폭행, 그녀를 쳐다보는 시선들에 대한 증오와 슬픔과 원망이 보였다. 당당하고 적극적인 듯 보였지만 결국 자신이 아닌 타인의 쾌락만을 위해 살아왔던 수동적인 삶에 대한 피해의식이, 재판장 앞에서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다’는 말에서 느껴졌다. 또한 부족한 것 없는 풍족한 집과, 훌륭하고 모범적인 듯 보이는 부모를
원망하는 것이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약하다, 보호해줘야만 한다, 재판에 설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부모가 그녀를 굉장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그들을 증오했다.
둘 중에 과연 누가 정의인가? 클로디아가 유죄판결을 받을 수 있음에도 능력자임을 주장한 것은 단순히 자존심에 불과한가, 아니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나? 자신들의 이름에 흠집이 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정당방위를 한 그녀를 정신병자로 만들어서까지 유죄선고를 피하고 형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 부모가 정의인가? 이 사이에서의 고민을 하게 되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하는데, 모델이 된 실제 주인공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할 때 어떻게 해서라도 유죄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큰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왜 능력자임을 주장하려고 한 것일까. 지금까지 말할 기회가 없었던, 자신을 이렇게 만든, 아픔을 준, 이제는 멀쩡한 자신을 미쳤다고 까지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시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또한 타인의 쾌락에 종속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또한 최근 우리나라에서 위헌여부로 논란이 된 성매매특별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성매매특별법은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로 이루어져있다. 전자는 성매매를 알선한 사람 혹은 성을 매매한 사람을 처벌하도록, 후자는 ’성매매 피해자‘들을 보호하고 지방자치단체 등이 그들의 자립을 돕도록 규정하고 있다. 두산백과,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28257&cid=40942&categoryId=31708
또 위헌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직업선택의 자유, 성적 자기결정권, 생계형 종사자들의 사례 등을 근거로 하여 성을 매매한 사람을 처벌하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인지, 또한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과연 ’피해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지 하는 의문이 든다.
현재 대부분의 성매매 종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고 있으며, 예전처럼 포주에게 끌려가 강제로 빚을 지고 평생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등의 경우는 드물다. 또한 완전한 빈곤 때문에 성매매를 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많지 않으며, 자신을 위해서든 혹은 다른 무엇을 위해서든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한’ 목적의 성매매가 대다수이다. 누구도 이들에게 성을 팔아 돈을 벌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사회가 성매매가 아니면 일을 할 수 없게 선택의 폭을 제한해 놓은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평범한 직장에의 취업 의지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으나, 쉽고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그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피해자라고 명명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 뿐더러, 생계형 성매매라고 해서 보호해주어야 할 어떠한 의무도 없다고 생각된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이 길 밖에는 없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같은 이유로 자신들의 불법행위를 정당화 하는 것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개인적 견해로는 성적 자기결정권과 직업 선택의 자유에 근거한 주장 역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신체나 이념, 행위 등을 자유롭게 사용, 결정하는 모든 권리에서 파생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헌법 역시 이러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으나, 그 권리의 주장이 사회에 해가 된다고 여겨질 때는 그렇지 않다. 성을 사고 파는 행위가 만연해진다면 그것이 사회에 해악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문란한 풍조로 인해 어떠한 형태로든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에 근거하여 성매매특별법을 위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생계형 종사자들을 예로 든 것과 모순된다. 같은 이유로 직업 선택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 역시 성매매가 사회에 끼칠 악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비합리적인 주장이다. 근본적으로 인류 보편적 시각에서, 또한 특히 한국 사회의 시각에서 인간 존엄의 일부인 성을 파는 것이 직업으로써 용인될 수 있는지도 미지수이다.
법은 사회에서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렇다면 성매매특별법을 반대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매매를 계속하도록 허용해주는 것이 과연 정의인가? 물론 성매매 종사자들이 피해자라는 점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법이 현재 그렇게 지칭하고 있다면, 성매매에 대한 허용은 법을 통해 계속적으로 피해자를 양산하는 것이므로 법의 취지에는 물론 일반 상식과도 배치된다. 더불어 개인 혹은 특정 집단의 권리를 위해 도덕적사회적 기초를 흔드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행동이 사회에 미칠 영향력과 외부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생활을 위해 사회에 해악을 가져오는 것은 사회적 존재임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며,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인 처사이다. 또한 기본적인 욕망을 자극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돈으로 매매하는 행위 또한 용인될 수 없다. 성매매 종사자들 역시 이러한 점을 이미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나서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이러한 이유들로 성매매에 대한 더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보며, 이것이 또 하나의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성매매특별법을 반대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에게는 무엇이 정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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