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에 대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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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주 4·3사건에 대한 보고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4.3사건 보고서
중고등학생 때 4.3을 접하는 것은 관련 행사에 참여 하거나 짧은 설명을 들은 것이 다였기 때문에 4.3사건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4.3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제주도민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억울한 사건이다.’ 정도였다. 이런 나에게 제주대학교에 입학한 것은 제주 4.3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입학 후 ‘제주 4.3의 이해’과목을 수강하게 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제주 4.3사건의 위령제를 처음 시작한 곳이 제주대학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위령제를 처음 시작한 제주대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4.3사건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 4.3의 직접적으로 발발 원인이 된 것은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다. 제주도민은 이 사건의 항의 목적으로 민·관 총 파업을 했다. 이에 미군정은 응원경찰과 서청 단원을 제주도에 파견해 테러와 고문을 일삼았다. 그러자 무장대가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1948년 제 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은 싸움을 멈추기 위해 평화 협상을 체결 했지만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협상은 파기 된다. 후에 5.10 총선거가 열렸고,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의 2개의 선거구만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 된다. 이는 대한민국이 정부가 수립된 후, 제주도가 신생국가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으로 인식 되어 전도민적 반항이라며 계엄령을 선포하는 원인이 되었다.
계엄령 선포로 중산간 마을을 시작으로 이유 여하를 막론한 무차별 학살을 펼쳤다. 1949년 6월 무장대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내륙에 있던 형무소 재소자와 예비 검속자를 재판 절차 없이 사살했다. 이 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개방되며 7년 7개월 동안의 비극적 사건은 막을 내린다. 4.3사건을 통해 희생된 사람의 수는 2만 5000명에서 3만 명이고 이는 당시 제주도 사람의 10분의 1이라고 한다. 유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정당한 이유 없이, 단지 군대의 탄압에 서로를 죽여야 했고, 서로의 죽음을 봐야 했다고 한다. 왜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해야 했을까? 정말 억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 제 67주년 제주 4.3 위령제
위령제 당일 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놀랐다. 위령제 시작 전 영령을 기리기 위해 국화꽃 한 송이를 사들고 위령제단에 들어가 묵념했다. 묵념 후 주위를 둘러보니 눈물을 훔치고 있는 어르신이 있었다. 어르신을 보며 당시 사람들이 겪었을 고통이 느껴져 마음이 아렸고, 4.3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 수 없다고 느꼈다. 제단을 나온 후 위령제를 잘 보기 위해 앞자리에 앉았다. 위령제는 차분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치러졌다.
▷ 67주년 제주 4.3 위령제 관련 기사
위령제에는 국무총리, 여당대표, 야당대표 등 사회적으로 지위 높은 분들이 참석했고, 화해와 상생을 강조 했다. 위령제가 끝나자 4.3에 대한 많은 기사가 쏟아졌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