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행복 그리고 대인간 커뮤니케이션-물들어 간다는 것
이제야 만난 나
나는 어렸을 때 자존감이 많이 낮은 편이었다. 어딜 가나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모험정신도 전혀 갖지 못했다. 고등학생 시절 땐 음악인에게 가장 치명적인 무대공포증 까지 있어 꽤 고생도 했었다. 언젠가 한번 ‘너에 대해서 소개해봐’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머리를 세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이름, 나이, 꿈 이외에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운동을 즐기는지 조차도 몰랐다. 나는 나를 모르고 살아왔던 것이다. 또 나는 조울증을 심하게 앓았던 적이 있다. 어떤 ‘나’인지도 모르는 채로 계속해서 스스로 날 옭아매고 가혹하게 대한 탓이었다. 조금만 기분이 틀어지면 자살 시도를 해왔고 가족들은 매일 같이 날 위해 기도를 했다. 부모님은 나에게 ‘널 사랑하고 아껴라’라고 하셨지만 그때마다 난 ‘방법을 모르겠다.’라며 다시 우울함에 빠져들었다. 내가 날 사랑하지 못하니 남들에게 의존하며 사랑받고 싶어졌고 그렇게 나는 남 탓만 하며 많은 사람을 잃었었다. 아직도 나는 나를 완전히 사랑하고 알고 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첫 수업 교수님의 말씀들이 ‘진정한 나’에 대해 한 발짝 더 다가서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대인간 커뮤니케이션은 무엇을 공부하는 것일까? 2016년 1학기의 첫 수업 시간 때, 교수님은 이렇게 질문 하셨다.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방법을 배우는 수업이라 학생들은 답했고 그 때 까지만 해도 나는 특별한 방법의 여부에 의심을 품었고 상대방의 대한 이해와 정보, 예의를 갖춘 에티튜드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했던 커뮤니케이션은 단면적이고 1차원적으로 밖에 생각을 못한 것이었다. 수업을 듣게 된지 2달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내가 다시 재정립, 재인식한 ‘대인간커뮤니케이션’ 과 ‘진정한 행복’ 그리고 ‘나 자신’ 에 대해서 진솔한 나의 생각을 말해보고자 한다.
나-진정한 행복-진정한 만남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선 우선 만남이 존재해야 한다. 즉, 제대로 된 대화를 위해선 제대로 된 만남이 필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나 어제 누구 만났어. ‘나 요즘 이런 남자 만나’ 이렇게 우리는 쉽게 만남이라는 단어를 이용하고 있지만 그 만남이라는 단어에 깊은 뜻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수업을 듣고 만남은 그리 쉬어서도 안 되며 단순하지도 않은 뜻으로 내게 다시 다가왔다. 우리가 생각하는 만남이 사실은 만남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에 머물러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렇게 머물 수도, 진정한 만남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는 것을 느낀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결국 우리는 정체성이 확립되었으며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들끼리 하는 만남과 대화만이 진정한 대인간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 약하고 여리고 결핍되게 만들어 졌다. 이건 왜 그런가 하면 그런 상태로부터 뭐든 하라고, 뭐든 느끼라고 신은 인간을 적당히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약한 게 싫거나 힘에 부치는 사람들은 자신을 그렇게 방치하면 안 되겠다는 몇몇 순간들을 만난다. 그래서 불완전한 자신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을 순례라고도 하며 순례의 길을 걸으며 진리를 깨우치려 노력하고 진정한 행복, 사랑을 찾으려 애쓴다.
지금의 나가 그런 상태라고 느꼈다. 진정한 행복과 만남에 대한 고찰은 내가 지금까지 느끼고 경험했던 행복과 사랑 그리고 만남에 의문을 던지며 시작되었다. 아직도 나는 완전히 행복감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단언 할 수는 없다. 시골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홀로 어렵게 음악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어른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굳이 받을 필요가 없었던 상처들도 받아가며 목표 대학교에 입학하니 1학년 때의 나에게 있어선 더 이상 내가 이뤄야 할 목표나 꿈이 없었다. 개천에서 용난 나는 그 이후의 계획도 없었을 뿐더러 그 이상의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다. 물론 있었더라도 오히려 그 목표를 회피한 채로 만족감에 빠져서 행복감을 향유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는 나의 인생 안에서 분명한 태도를 지니지도 못했고 일시적으로 행복감을 느끼고 실망하며 끊임없는 삼각형의 반복과 같은 꼴로 지냈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행복하기를 두려워 한 거 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일시적인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행복하면 죄를 짓는 것만 같은 이 비정상적인 사회 안에서 ‘나 요즘 너무 행복해’ 라고 하는 순간 ‘왜 너만 행복해’,‘사실 행복한 척 하는 거지?’, ‘행복하다는 환상 속에서 사는 구나’ 같은 득달같이 달려드는 조롱 섞인 말들과 ‘화’를 품은 눈초리들 때문에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도 누릴 기회도 못 잡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행복하다’ 이야기하는 사람이 희귀한 사회가 되어버렸고 ‘즐겁다’ 이야기하는 사람이 놀라운 사회가 되었다. 만남_10차원의 행복이라는 책 안에서는 남과 행복을 비교를 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를 가만히 돌이켜보니 결국 이런 사회는 행복감을 행복이라고 느껴왔던, 남이 행복하다 할 때 진심으로 축복하지 못했던, 행복감과 행복 안에서 조차 남에게 비교하는 옹졸한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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