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과한국전쟁] 중공군의 개입과 국제전(36)
2. 중․미 전쟁의 체제와 전개
3. 정전회담의 개시
한반도의 전쟁으로 동북아의 분위기가 냉전의 극대화를 보이고 있을 시 인접국이자 공산당혁명을 승리한 중국으로서 한국전쟁을 대하는 태도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공산당 지도부는 한국전쟁의 발발 후부터 북한의 공산당을 원조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였고 의견의 갈등을 보였다. 마오쩌뚱은 한국전쟁의 참전에 대해 강력하게 참전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고 미국의 중국 본토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더라도 우리의 투쟁은 계속될 것이라는 결의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들의 반대근거는 중국내의 혁명 후 국가안정화에 더욱 노력을 하여야 한다는 것과 병력을 한국전쟁에 투입함에 따라 예상되는 국민당 세력의 도발, 그리고 육군만으로 무장된 중국의 군대가 미군의 해군과 공군의 공세를 이겨내기 힘들 것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원폭에 대한 우려였다. 마오쩌뚱은 반대의견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면서 한국전쟁에의 참전을 선언하였고 이는 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며 미국과의 대치는 언젠가는 전쟁으로 이어질 것임을 강조하였다. 한국의 전쟁상황은 북한군이 전쟁 초기에 급속도로 남하하여 낙동강 전선까지 한국군을 밀어 부쳤고 이후 미군의 개입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서울을 반환하게 되었다. 소련의 스탈린은 이 보고를 받은 후 군사고문을 비판하고 북 지도부에는 동정적으로 생각한다. 서울이 탈환되고 중국에서는 적극적으로 참전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지켜보기 시작한다. 당시 중국은 참전에 대비하여 소련에 공군원조를 허락 받고 차근차근 전쟁에 임하게 된다. 북한도 스탈린과 중국에 국제의용군 부대를 원조해 주기를 요청하고 10월 1일에는 중국인민해방군의 출병을 요청한다. 중국은 10월 2일 참전결정을 내리고 5일 출병의 결의를 채택한다. 그리고 10월 8일 펑화떠이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설립된다. 소련의 몰로또프는 약속한 공군지원을 할 수 없다고 중국 측에 전하고 중국은 잠시 참전을 보류하지만 10월 19일에 마침내 중국군은 압록강을 건너서 전쟁에 가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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