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과한국전쟁] 중공군의 개입과 국제전(39)
2. 중․미 전쟁의 체제와 전개
3. 정전회담의 개시
한국전쟁 당시 중국은 타이완 공격 시기를 연기하고 있었다. 바다를 넘어 타이완으로 가기 위해서는 공군과 해군이 있어야 하나 중국에는 아직 이러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미국의 개입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시작되어 조선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동안 중국 내에서는 참전 여부로 논의가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참전하는 데에 있어 미국의 공군력과 원자폭탄이 문제였다. 이에 마오쩌뚱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한다 할 지라도 미국과 싸울 수 있으며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9월 15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쟁의 흐름은 변하여 한미군은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공격을 하게 된다. 이 때 보고를 받은 스딸린은 인민군의 소련인 군사고문을 통렬히 비판하지만 북한 지도부에는 최대한 동정적인 자세를 보인다. 9월 29일에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스딸린에게 전보를 보내 소련의 직접적인 원조나 중국 및 그밖의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국제의용군 부대를 조직할 것을 원조해 주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10월 1일에는 중국에 중국인민해방군을 출병해달라는 요청문을 보낸다. 이에 스딸린은 슈찌꼬프에게 조선을 도와주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내고 중국에도 의용군 요청 전문을 보낸다. 중국 공산당 회의에서는 10월 2일 참전 결정이 내려지고 5일 즉시 출병 결의를 채택한다. 이에 10월 8일 펑떠화이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설립된다. 그리고 저우언라이를 스딸린에게 보내고, 그는 중국이 출병하는 대신 소련은 무기와 장비를 공급하고 일정량의 공군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러나 저우언라이가 후에 몰로또프와 재교섭 하였을 때 몰로또프는 소련은 약속한 공군지원을 실시할 수 없다고 중국 측에 전한다. 이에 중국은 참전을 잠시 보류하나 결국 조선으로 출동하는 것이 중국에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마침내 10월 19일 중국군은 압록강을 건너게 된다. 또한 스딸린의 은밀한 명령에 따라 소련 공군 비행사는 중국 공군 비행복을 입고, 기체에는 북한 마크를 붙인 채 참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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