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과한국전쟁] 중미전쟁
2. 중․미 전쟁의 체제와 전개
3. 정전회담의 개시
1. 다시 중국의 참전에 관하여
중국이 참전하기까지 중국 내의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전쟁이 시작되고 조선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동안에도 미국의 참전을 예상하며 불안한 눈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에 마오쩌뚱은 미국의 원자폭탄 사용 예상을 감안하고라도 전쟁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는 인천상륙작전 이전의 이야기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의 흐름이 변하자 소련과 중국, 김일성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9월 19일 스딸린에게 전보를 보내 지원 요청을 하였다. 그 역시 소련군이 직접 개입해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가 노린 것은 중국군의 원조를 구하는데 소련이 영향력을 행사해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의 노림수대로 스딸린은 마오쩌뚱에게 요청전문을 보내고 결국 중국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는 10월 2일에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그후 정치국 확대회의는 계속되었으나 마오쩌뚱의 강력한 설득으로 10월 5일에 이르러 즉시출병을 결의한다. 그리고 저우언라이의 방소를 보면 소련의 공군출동을 전제로 출병을 한다는 작전으로 스딸린의 원조를 교묘히 끌어내게 된다. 소련의 공군출동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도 이미 마오쩌뚱은 출병의지가 다분했고, 소련도 50년 11월에 결국 공군지원을 시작한다. 단, 스딸린은 소련군이 참전하고 있음을 숨기도록 엄격히 조건을 달고 소련공군 비행사에게 중국 공군 비행복을 입히고, 기체에는 북한 마크를 붙이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렇게 10월 19일 중국군은 드디어 압록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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