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과한국전쟁] 중공군의 개입과 국제전(23)
한국전쟁이 시작되어 조선인민군이 남진하는 동안 중국은 불안해졌다. 미군의 반격이 있을 것임을 많은 사람들은 예견하고 있었다. 중국의 참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양국의 군사력과 미국의 원자폭탄 사용 위협이 큰 변수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참전을 주장했다. 그는 전투력만으로는 중국이 우세하다고 점쳤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으로 상황이 변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에게 직접적 군사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사실 소련의 직접 원군 보다는 중국 압박을 통한 간접 지원을 이끌어내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출병 요청을 위해 베이징에 갔다. 10월 2일 중국공산당은 참전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애초에 중국은 소련 공군의 출병이라는 조건을 내걸었으나, 13일에는 그에 상관없이 무조건 중국군이 참전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소련에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이 전에 출병이 어렵다는 언질을 내놓아 소련의 원조를 끌어내려고도 했다. 결국 스탈린은 무기와 장비를 공급하고, 엄호 목적의 공군을 비상시 출격시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직접 개입 표시를 내지 않기 위해 기체에는 북한마크를 달고 비행사들에게는 중공군 비행복을 입혔다. 10월 19일 중국군은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6 ․ 25는 이제 중미전쟁이 되었다. 유엔군의 이름으로 미군이 출동한 후 한국군이 유엔군 사령관 지휘 하에 이미 들어갔기 때문이다. 또 북한 인민군은 괴멸상태였기 때문에 첫 번째 전투는 중국군 단독의 싸움이었다. 중국 인민지원군은 점차 미군과 한국군에 타격을 주면서 남하해왔다. 12월 6일 미군은 38도선을 향하여 퇴각을 개시하고, 지원군은 평양을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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