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과한국전쟁] 중공군의 개입과 국제전(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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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남북분단과한국전쟁] 중공군의 개입과 국제전(17)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다시 중국의 참전에 대하여

2. 중․미 전쟁의 체제와 전개

3. 정전회담의 개시
본문내용
≪한국전쟁≫ 5장 요약 정리

1. 다시 중국의 참전에 관하여
(인천상륙작전 이전의 중국의 입장) 조선인민군이 계속 승리하며 진격하는 동안 중국은 미국의 반격을 예견하며 중국의 참전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논의는 원자폭탄도 두려워하지 말자고 강하게 주장한 마오쩌둥에 의해서 많이 좌우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해 전쟁의 흐름이 변했다. 김일성 등의 북한 지도부는 소련에게 중국군의 원조를 구하는 것을 도와주기를 바라는 한편 중국에도 직접 원군을 요청하였다. 스딸린은 전술상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북한 지도부에 동정적이어서 그들을 격려하며 진정시키려 하였고 중국에 원군 파견을 요청하였다. 따라서 중국은 소련과 북한의 요청을 동시에 받게 된 셈이다. 중국은 10월 2일 회의를 통해 참전을 결정하는 한 편 소련의 원조 및 공군지원 문제 상의를 위해 특사를 보냈다. 스딸린은 원조는 할수 있고 소련군의 공군도 출동할 수는 있으나 역할을 한정시켜야한다고 주장하는 소극적인 입장을 계속 취하였다. 중국측은 소련의 공군 출동과 관련된 논란 끝에 참전을 확정하고 10월 19일 압록강을 넘었다.

2. 중미전쟁의 체제와 전개
(중국 참전 이후 1차 전투) 북한군은 중국군 사련관의 지휘 아래 들어가 한국전쟁은 중미전쟁이 되었다. 인민군이 정비되기 전이므로 중국군 단독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첫 전투가 있었던 10월 25일 경부터 11월 4일 까지를 제 1차 전투라고 본다. 이 전투에서 미군과 한국군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덕천 개천 안주 근처까지 밀렸다.
(2차 전투) 2차 전투는 미군이 병력을 집결하여 반격에 나선 11월 8일부터이다. 하지만 계속 퇴각하여 12월 6일에는 중국군(지원군)이 평양을 회복하였다. 2차전투 중간에는 인민군이 병력을 정비하여 다시 합류하였다. 중조군이 38도선까지 진격한 후 주력을 정지시켰는데 여기까지를 2차 전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