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과한국전쟁] 중공군의 개입과 국제전(38)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참가하자 내전은 중미전쟁이 되었다. 유엔군 이름으로 미군이 출동한 후에는 한국군은 유엔군 사령관인 미군 사령관 지휘 아래 들어가 있었다. 이번에는 북한군이 중국군 사령관 지휘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중국군이 북한으로 들어올 때에는 조선인민군은 재편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첫 번째 전투는 중국군 단독의 싸움이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10월19일에 북한에 들어왔으나, 25일경부터 전투에 들어가 11월4일까지의 제1차 전투에서 미군과 한국군을 덕천, 개천, 안주까지 밀어냈다. 제2차 전투는 미군이 중국지원군의 진격을 저지하도록 병력을 집결시켜 11월8일 반격에 나선 곳에서 시작되었다. 11월25,26일 지원군은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12월6일 미군은 퇴각을 개시하고 지원군은 평양을 회복하였다. 그런데 제2차 전투 도중에 조선인민군 부대가 재등장했다. 어쨌든 조선인민군을 포함한 통일적 지휘가 필요해졌다. 마오쩌뚱의 지시에 따라서 펑떠화이가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의 연합사령부(연사)를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리하여 지휘권은 연사가 쥐고, 펑떠화이가 최고사령관이 된 것이다. 38도선까지 한미군을 격퇴한 펑떠화이는 군을 정지시켰다. 휴양과 보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펑떠화이는 12월8일 38도선을 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제출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오쩌뚱은 38도선을 넘어 개성지구까지 나아가라고 지시하였다. 펑떠화이는 15일 38도선 이남을 향해 전진한다고 보고하였으나, 신중한 노선을 버릴 의도는 없었다. 펑떠화이는 38도선을 점령하여 혹시 한미군이 서울을 포기할 것 같으면 인민군 제1군단에게 점령하게 하고 주력은 38도선 북쪽으로 돌아가 휴양한다는 제안을 하고 12월29일 마오쩌뚱은 이 의견에 찬성하였다. 12월31일에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 1군단은 38선을 넘어 진격하였다. 제3차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서울은 1951년 1월4일 점령되었다. 두 번째의 서울점령을 통제한 것은 중국 측이었다. 서울점령 후 37도선까지 부대가 진출한 1월7일 펑떠화이는 진격을 중지시켰다. 이상이 제3차 전투다. 펑떠화이가 멈춘 것은 미군 측이 남하를 유인하여 인천상륙작전의 재연을 노리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3차 전투 후 중조군은 휴양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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